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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21년 9월 23일 오후 3시 12분]
'개방입양'이라는 말이 있다. 입양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밀입양과 공개입양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의미를 짐작한다. 그 어렴풋한 짐작이 비밀과 공개의 본질적인 의미와 맥락 상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개방입양'이라는 단어는 입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더불어 입양을 개괄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다음은 아직 국어사전에는 없는, 학술적 의미의 개방입양에 대한 개념이다.
'입양이 진행되기 이전이나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입양된 사람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낳아준 부모와 입양부모 사이에 정보가 교환되고 접촉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 개방의 정도는 매우 다양하여 이름, 신상명세, 건강기록 등을 교환할 수 있고, 대면하거나 지속적인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러한 절차의 궁극적인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 사회복지학 사전, 이철수 외 공저, 2009. 8. 15. Blue Fish.
이처럼 '개방입양'은 생부모와 입양부모가 입양아를 중심으로 서로 용인된 정보를 교환하고 협의된 접촉 관계를 가지는 것을 뜻한다. 개방입양은 입양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북유럽 나라들에서는 보편적인 입양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직 공개입양조차 보편적 문화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요원한 문화가 '개방입양'이다.
입양부모 입장으로 '개방입양'을 상상해 봤다. 정말 담담하게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내 딸 아이의 생부모와 거리낌 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아이를 공유할 수 있을까? 태어나 한 달도 안 돼 내게 와서 제 평생을 오로지 나의 딸로만 살아 온 아이에게 생부모가 나타나고, 정기적으로 만나고, 새로운 유형의 부모 관계를 맺는 일련의 과정이 과연 나와 아이에게 그리고 생부모에게 이로운 걸까? 나와 이미 굳건하게 맺어져 있는 부모 자식간의 유대 관계에 혹시라도 균열이 생긴다면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이는 그런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어떤 확신도 들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납득이 되지만 정서적으로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편적 시민의식과 가족공동체의 작동원리가 전혀 다른 동양과 서양의 입양문화를 감안했을 때 서양에서 자리 잡고 있는 개방입양이 동양의 입양문화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다.
한옥마을로 유명한 전북 전주에 이런 생소한 개방입양을 경험한 부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체 없이 전화를 했고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딸 하나를 낳고 아들 둘을 입양해 키우며 사는 김기남(가명, 45), 권미숙(가명, 43)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인터뷰는 김씨와 진행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방입양'
부부는 같은 대학(전북대학교 철학과와 간호학과)을 다녔고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만났다. 김씨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둘 모두 모태신앙이었다. 교제를 시작하고 몇 달 뒤 김씨의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
남은 아파트를 건지기 위해 서류상 이혼으로 시작했지만 부모님은 다시 합치지 않고 각기 다른 배우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신앙인으로서, 장남으로서, 김씨에게 그건 굉장히 큰 아픔이었고 상처였지만 가정의 소중함을 뼈에 새기는 계기도 되었다.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둘은 결혼했고 이듬해 첫 딸 혜미(가명, 15, 중3)를 낳았다. 2년 뒤 생후 5개월이던 아들 준석(가명, 13, 중1)이를 입양을 했고, 4년 뒤 생후 9개월 된 아들 찬석(가명, 9, 초3)을 입양했다.
- 딸을 낳고 몇 년 뒤에 입양을 하셨어요.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아내와 교제할 때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만 낳고 입양을 하자고 했어요. 아내도 거부반응이 없었어요. 부모님 이혼을 보면서 가정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죠.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도 생각을 했어요. 사회에서 소외 되고 낙오된 아이들에게 법적으로 부모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 그 아이를 위해서도 굉장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죠.
물론, 보육원에서 자라도 먹고 입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만 아이의 내면까지 채울 수는 없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는 울타리 역할을 해 주는 게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제가 아버지 사랑을 많이 못 받았어요. 아버지와 즐겁고 뜨거웠던 기억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가정의 소중함이 더 많이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김씨 부부가 처음으로 입양한 아들 준석이는 부모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기아 아동이었다. 입양을 하려고 지역 영아원을 방문하던 차에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그룹에서 지인을 통해 위탁 중인 아이를 소개를 받았다. 앞서 먼저 선 보기로 했던 아이가 있었지만 '무조건 첫 번째 만나는 아기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입양을 결심했을 때의 생각 때문에 주저 없이 준석이를 입양했다.
- 공개입양을 하셨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일단 낳은 딸이 있기 때문에 비밀로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어요. 설사 불임이라 해도 교제할 때부터 입양을 생각했을 때도 공개입양이다 했죠."
- 입양부모와 외부의 시선이 틀리잖아요? 입양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는 아이가 받을 상처 이런 것도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입양 전에 그런 생각을 하셨던 이유를 좀 더 듣고 싶은데요?
"입양하기 전 생각이 만약에 비밀로 했다고 해서 유지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출생에 대한 것들을 사실대로 얘기를 하자. 물론 출생에 대한 호기심이나 의구심도 있고 반작용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양육하는 과정에서 신뢰관계가 되면 백 프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아이가 사춘기를 잘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는 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우리 책임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 4년 뒤에 또 찬석이를 입양했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준석이 입양하고 입양가족 자조모임인 '한국입양홍보회'를 알았어요. 지역모임을 자주 나가고 활동도 열심히 했어요. 지부장을 하라고 해서 5년 동안 전북지역 대표도 했어요. 그 모임에 나가면 둘째 셋째 입양하라고 해요. 해 보니까 좋거든요. 능력이 부담되어서 그렇지 자식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모임 분위기도 그렇고 우리 부부도 셋째 욕심이 생긴 거죠. 어쨌든 한 아이라도 보육원에서 자라는 것보다는 우리가 가족으로 울타리를 해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준석이는 자유롭고 활동적인 기질을 타고 났다. 순종적이고 얌전한 딸 혜미와는 기질이 다른 아들을 힘들게 키워 내면서 부부는 딸을 입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빚어낸 운명은 이들 부부를 계획에는 없던 또 다른 삶으로 안내를 했다.
- 찬석이는 어떤 경로로 입양을 하셨어요?
"홀트에서 했어요. 상담과정에서 딸을 입양하려 한다고 했어요. 근데 담당자가 잠깐 기다려보라 하면서 나가시더니 9개월 된 남자 아이를 데려 온 거예요. 찬석이였죠. 우리는 딸을 입양하려고 했기 때문에 만약에 찬석이가 그 자리에서 울고 떼쓰고 그랬으면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찬석이는 울지도 않고 아주 조용했어요. 잠을 잔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랬는데... 그때 담당자가 찬석이 엄마가 바로 문 밖에 있다고 얘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왜 저한테 그걸 얘기하세요. 그랬는데 담당자가 나가서 한번 만나 보자고 해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날이 찬석이 엄마가 찬석이와 영원히 작별하는 날이었어요. 7개월을 키워 오다 시설에 맡겨 놓은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죠. 그분이 제 아내를 보더니만 끌어안고 울어요. 고맙다고... 그렇게 연결되어 버린 거예요. 우리는 상담만 하러 간 건데 우리가 입양하는 걸로 그분은 오해를 한 거죠. 그 자리에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준석이 때처럼 처음 만난 아기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이라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긴 했어요."
찬석이 생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인과 교제를 했다. 곡절 끝에 미국인은 그녀의 실수를 용서했고 아이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는 미국에 있는 누나 밑으로 입양을 해서 데려갈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은 김씨 부부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와 미국인은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렇게 태어나 7개월을 생모와 함께 살았던 찬석이는 시설에 맡겨졌고 생모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틈틈이 시설을 찾아 와 찬석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지만 김씨 부부가 입양을 상담하기 위해 찾았던 바로 그 날 찬석이를 영원히 품에서 놓아야 했다.
그렇게 한 여인에게는 낳은 아들을 떼어 놓아야 하는 가슴 미어지게 슬픈 날이 한 여인에게는 아들을 처음 가슴으로 품은 그런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벅차기만 할 수는 없었던...
품에서 놓은 생모, 그 아들 품어안은 입양부부
- 그 뒤로 미국으로 떠난 생모와는 어떻게 되었나요? 연락은 하셨나요?
"우리는 어차피 공개입양을 했기 때문에 연락을 하려 했는데 연착처가 없었어요. 그때 그분에게 제가 '한국입양홍보회' 홈페이지에 입양일기를 쓰니까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거기에 연락처도 써 놓고 사진도 가끔 올리고 그랬어요. 일기를 참 많이 쓸 때였어요.
세월이 흘러 찬석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였어요. 재작년 일이네요. 그때 정말 7년 만에 전화가 왔어요. 남편하고 시댁에서 한국에 보내줬대요. 2주 동안 다녀오라고. 가서 아이도 보고 오라고 그랬다고 해요. 한국에 와서 일주일은 망설이기만 하다가 일주일 남겨 놓고 전화를 한 거예요. 저도 처음엔 많이 놀랐어요.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찬석이 엄마라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요.
초등학교 입학 한 아이가 보고 싶은 거였어요. 제가 홈페이지에 휴대폰 번호까지 적어 놓았으니까. 그렇게 연락을 했던 거죠. 많이 놀랐죠. 이 분은 우리 생각을 몰라서 두려웠고 전화를 해도 되는지 많이 망설였대요.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찬석이의 반응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괜찮은데 찬석이는 모르겠다고, 얘기 해 보고 다시 통화 하자고 했지요.
찬석이한테 그 이야기를 하니까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가만히만 있어요. 그래서 '대답하기 어렵지? 엄마 아빠 생각은 만나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랬더니 특별하게 거부를 안 해서 진행을 시켰죠."
- 언뜻 생각해도 초등학교 일 학년 나이에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게 저는 조금... 그게 괜찮을까 이런 생각이?
"지금도 그렇지만 다 모험이에요. 준석이나 찬석이나 사실 모험이긴 모험이지만 우리들이 그만큼 케어하고 돌보는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모험은 모험이지만 우리 부부가 불확실한 모험은 아니도록 도와주고 관계를 단단하게 맺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시에도 찬석이가 노라고 했으면 못했죠.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만 살짝 만나고 말아야지. 그랬는데 찬석이가 예스 노를 안 해줬어요."
- 찬석이에게 양가감정이 있었겠죠?
"그랬겠죠."
- 그래서 그렇게 만나셨네요?
"우리 집에 왔어요. 금요일 전화 오고, 토요일 오전에 바로 와서 만났죠. 만나는 순간 그분은 많이 우는데 처음에는 찬석이가 저한테 딱 붙더라고요. 반사적으로. 그분이 자기가 엄마라고 하니까 반가운지는 모르지만 두렵기도 했나 보죠. 딱 붙더라고. 그러다 그분이 막 우니까 찬석이도 눈물 흘리고, 아내도 울고 다 울었죠. 한참을 모두가 그렇게 울었어요."
"생모하고 급속도로 친해지니까 좀 충격"
- 찬석이가 처음에는 피했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서로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고 가라고 했어요. 하룻밤 자고 한옥마을도 가고 동물원도 갔어요. 그러면서 아이들하고 그분하고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한옥마을에서 그분이 토끼 인형을 사줬는데 준석이하고 찬석이하고 그분에게 별명을 붙여줬어요. '토토엄마'라고. 그때 감사한 것은 준석이는 생부모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아이인데 찬석이하고 그분하고 함께 다니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거 같았어요. 나를 낳은 엄마는 아니지만 동생과 동생을 낳은 생모를 보면서 출생에 대한 좀 가까운 경험을 했다고 할까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봤으니까."
- 준석이가 긍정적인 생각을 했겠네요?
"그렇죠. 좋은 모습을 봤으니까. 그런데 이게 찬석이하고 생모하고 그렇게 급속도로 친해지니까 우리 부부가 좀 충격이었어요. 찬석이하고 준석이하고 생모를 한 방에서 자라 하고 우리도 자러 누웠는데 '우리가 좀 마음이 이상하네'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요."
- 왜요?
"우리가 공개입양을 했지만 사실 이거는 공개입양을 넘어서 개방입양이라고 하거든요. 삼자가 다 통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아기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제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하거든요. 그 이후에는 상관없어요. 미국에 가서 살아도 돼요. 근데 그 전에는 아이한테 혼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못 믿어서가 아니고요."
- 내 새끼인데?
"아니요. 그럼 감정보다도 아이가 혼란 될까봐. 우리 부부는 딸 혜미도 마찬가지고요. 준석이 찬석이를 우리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아요."
- 개념적으로는 저도 동의 하지만 부모자식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유대관계가 이미 7년이라는 세월 동안 확실하게 맺어져 있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생모가 나타나서 급속도로 친해지면 저라도 굉장히 서운 할 것 같긴 한데요?
"우리가 자면서 했던 말이 이게 딸 시집보내는 마음인가 보다. 오죽했으면 아내한테 그렇게 말하긴 했어요. 그리고 그해 여름에 그러니까 몇 달 뒤에 만나자고 했나 봐요. 미국에서 가족들이 함께 올 거라고.
그렇게 만나자는 걸 우리 부부한테 먼저 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했어요. 그래서 약간 그랬죠.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부분은 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어요. 지금은 그런 때는 아닌 것 같다고. 좀 크고 사춘기 지나고 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생 되면 그때는 괜찮겠다고."
- 다시 연락을 하지 마라는 의미였나요?
"제 의도는 그것까지는 아니었어요. 그저 절제를 부탁한다는 그런 의도였죠."
- 생모 입장에서는 서운했겠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게 이틀을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서 출국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 상처를 받았나보네요?
"그럴 수도 있고... 본인이 현실을 안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 그럼 찬석이하고 생모하고 그렇게 만남이 끝났나요?
"그런 셈이죠. 연락처는 그대로 있는데 연락이 안 오고 좀 지난 다음에 영문으로 메일이 왔어요."
- 어떤 내용이었나요?
"그때가 그립고 다시 만나고 싶다는 식으로. 근데 제가 볼 때는 이분이 아니라 남편이 쓴 것 같아요. 엄마라면 한국말로 썼을 거예요. 아마 추측컨대 이 분이 미국으로 돌아가서 많이 힘들었던 것 아닌가 해요. 힘든 모습을 남편이 보고 안쓰러워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이 부부에게 자식이 없어요. 만약에 자식이 있었더라면 상황이 달랐겠죠."
- 그러면 찬석이를 본인들이 키우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겠네요?
"그래서 저도 그런 생각을 해요. 찬석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만약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보낼 생각도 있어요. 그때 그분도 방학 때는 보내라고 그랬거든요. 방학 때는 얼마든지 보내라고."
- 찬석이가 나중에 실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면 당연히 보내주시겠지만 많이 서운할 것 같은데요?
"아이 그럼요. 쉽게 얘기하면 장가보내는 거죠. 근데 저는 혜미도 그런데 물론 사랑하는 자식이긴 하지만 저는 자식에 대해 성년이 될 때까지 울타리 개념이 커요. 우리가 아이들 인생을 좌지우지 할 것 아니다. 성년이 되고 난 후에는 자기 인생이고 그때까지는 우리가 바르게 양육을 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가르쳐야 된다. 그게 우리 책임이라고 생각을 해요. 찬석이가 그때 간다면 서운하죠. 근데 본인이 원하고 그 쪽에서도 원한다고 하면 거기서 계속 살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이가 클 때까지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인격이나 건강, 지식 등은 우리 책임이라고 보고요. 저는 그게 입양이라고 생각해요."
-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셨어요? 개방입양이 유럽이나 미국 같은 문화에서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문화를 이루는 근간이 다른데요?
"저는 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계속 같은 얘기를 하는데 애가 사춘기는 지나야 되지 않을까 해요. 사춘기 지나고 고등학교 졸업 하고 그 뒤에 라면 충분히 혼자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존중해야 하겠죠."
'개방입양'으로의 흐름
'개방입양'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생각은 자녀의 양육에 대한 본인의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사고가 열려 있었고 자녀 양육에 대해서도 자녀의 입장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모가 찾아와서 처음 찬석이와 함께 잠을 자던 날을 회상할 때 그의 말과 표정에서 묘한 질투심이 읽혔다.
7년을 키워 온 내 새끼가 7년 만에 나타난 생모와 잠을 자면서 급속도로 친해지는 모습을 보였을 때, 부모로서 심정이 어떠했을까는 상상만으로도 능히 그 감정의 떨림이 전해질 수 있었다. 나 또한 입양부모였기 때문이다.
입양을 통해 자식을 만들었어도 낳은 자식과 똑같은 '내 새끼'라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부모마음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것의 출발이 사회적 책무에서 시작했든 나처럼 단순히 딸을 키우고 싶은 욕심에서든 마찬가지다. 솔직히 아직은 나 역시 내 딸을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일상 속에서 공유하는 그런 '개방입양'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생부모의 권리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자식을 키워내는 양육의 길에도 한 부모의 일관된 흐름이란 게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일관성이 지켜질 의식의 고양과 문화적 토양이 자연스럽게 '개방입양'으로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거라 생각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큰 길로 곧장 나가면 있는 버스정류장을 찾지 못해 허둥거렸다. 사실 그 간단한 길을 찾지 못해 허둥댔던 것은 정작 내딛는 발이 아니라 복잡해진 마음이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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