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순씨에게 아들과 사별의 슬픔은 슬픔일 뿐 불행은 아니었다.
김지영
아이들과 함께 해외로 배낭여행을 시작한 게 강씨 나이 삼십대 후반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나이에 일찍 회사 임원에 오른 남편을 두었다면 아파트 평수 늘리고 아이들 학원 보내고 과외 시키며 엘리트 코스를 밟게 했겠지만, 강씨는 그 마땅한 길을 처음부터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게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 곳곳을 걸어서 누볐다. 아이들과 함께 고생하고 부대끼며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행이 하면 할수록 좋았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공부에 흥미도 없고 성적도 좋지 않았던 도윤이는 중학생이 돼서는 엄마와의 여행을 통해 목표의식이 생겼고,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시험 쳐서 들어가는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도윤이가 베이징에다 여행사를 차리겠대요. 그때는 중국 문이 열리기 전이었어요. 하필이면 왜 중국이냐고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했죠. 싫대요. 자기가 여러 나라를 돌아 봤는데 중국이 가장 마음에 들고 베이징에 여행사를 꼭 차리고 싶다는 거예요."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강씨와 남편은 아들의 결정을 허락했다. 강씨가 먼저 베이징으로 날아가 도윤이가 공부할 학교를 물색했다. 일반대학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어학연수 코스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베이징사범대학으로 진로를 정했고 기숙사에 자리까지 마련해 놓고 돌아왔다. 곧 도윤이는 중국으로 떠났다.
"가는 날은 공항에도 안 나가 봤지만 엄마 (마음이) 어디 그래요.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아들 찾아 베이징을 오고 갔어요. 참 유학생활 잘했어요. 인정도 받고. 주말이면 기숙사에서 나와 머물던 집이 있었어요. 그 집 아들이 도윤이와 동갑이에요. 그 친구랑 같이 교회에 갔는데 간 첫 날 만난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그 여자 친구가 도윤이에게 굉장히 적극적이었고요. 도윤이가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어요. 그 집 아빠가 도윤이 가디언(후견인)인 셈인데 걱정이 되었나 봐요. 도윤이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은 가디언으로서의 책임도 있는 건데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에요."강씨보다 한 살이 많은 여자 친구의 엄마는 베이징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신분이었다. 전화 통화를 했고 방학을 맞아 귀국하는 대로 만나기로 했다.
"코엑스에 있는 호텔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제가 그 엄마한테 정말 반했어요. 남편과 함께 나왔는데 (남편이) 중풍인 거예요. 도윤이 여자 친구의 아빠인 거죠. 젊은 나이에. 저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 남편을 집에 두고 오죠. 얼마나 심하게 아픈지 입구에서 걸어오는 데 한 십 분은 넘게 걸리는 것 같아요. 남 일에 상관 안 하는 남편이 가서 부축을 해 올 정도였어요. 그렇게 자리에 앉았는데 딸 둘을 다 데리고 나왔어요. 우리도 도윤이하고 우리 딸하고 이렇게 넷이고 저 쪽도 딸 둘에 엄마 아빠까지 넷이에요. 참, 상견례지 그게. 고등학교 일 학년짜리 아들딸들이 서로 사귄다고 양쪽에서 온 가족이 출동을 한 거예요. 제가 그랬죠. 우리 아들 잘 봐 달라고. 그 엄마 하시는 말씀이 그냥 전화만 해도 되는데, 아이들끼리 친구하는 건데 이렇게 정중하게 불러서 비싼 식당에서 밥 사줘서 고맙다고. 그때 제가 딱 부러지게 얘기했어요. 너희 둘이 친구 해도 돼.그때부터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그 집에는 아들이 없으니까. 그 집에 일이 있으면 우리 아들이 가서 다 해 주고. 그렇게 일 년을 지냈어요. 그리고 그 해 여름 방학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고가 났어요. 그 전에 딸도 오빠처럼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하고 그래서 보내기로 결정했어요. 중국은 9월에 개학이에요. 여름 방학을 맞아서 한국에 온 도윤이가 하는 말이 '엄마 우리 둘 다 보내 놓고 엄마는 뭐 할 거'냐고 물어요. 그래 '난 너희들 보러 가야지.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게 내 일이니까.' 그랬더니 아들이 엄마 그러지 말고, 입양을 하면 어때? 라고 말했어요. 이게 참 무서운 이야기인데... 아... 아들이 굉장히 애들을 예뻐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그런 생각 꿈에도 안 했죠. 내가 무슨 입양을 해. 입양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지요."강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윤이의 사고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윤이가 방학 때 한국에 왔다가 돌아갔는데 그 여자친구 가족들이 베이징에서 열차로 하루 걸리는 계림이란 곳으로 여행을 갔어요. 다른 가족하고 도윤이도 데리고 갔죠.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난 거예요. 계림에 도착해서 여행사에서 내준 미니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윤이가 키가 크니까 제일 뒤에 창가에 앉아서 졸았어요. 머리를 기울이고. 버스가 방향을 틀 때 옆에 큰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대요. 버스가 회전하면서 트럭 백미러를 탁 쳤는데 부딪힌 곳이 졸고 있던 도윤이 머리 쪽이었어요. 차 유리가 깨지면서 머리에 박혔어요. 다른 사람은 손도 하나 안 다쳤죠. 계림에 있는 병원에 데려다 놓고 바로 연락이 왔어요. 애가 다쳤다고..."사고같지 않은 사고, 그리고 떠나 간 아들- 그때 아이는 어떤 상태였나요?"사고 나는 순간 바로 뇌사 상태였어요. 저는 처음 연락 받았을 때는 우리 애가 팔이나 다리가 다친 줄 알았어요. 연락이 왔을 때 그냥 애가 다쳤다고만 말을 했거든요. 하루 만에 비자 받고 다음 날 중국으로 우리 세 식구가 갔어요. 갔는데 병원에서 뇌사 상태라는 거예요. 근데... 이 (여자친구) 엄마가 나를 보더니... 아직도 그 표정을 잊어 버릴 수가 없어요.
죽을 죄 지은 그런 죄인 같은 얼굴 있죠? 나도 내가 어떻게 그랬는지 몰라요. 저 사람이 왜 죄인이어야 하나. 내 애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여행을 데리고 갔는데. 괜찮다고 내가 왔으니까 괜찮다고. 어젯밤에 잠 못 자고 그랬으니까 가서 자라고 이제는 내가 왔으니까 가서 쉬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애를 만났어요. 근데 곧 깨어날 것 같은 거예요. 아무 상처도 없고 머리에만 유리가 박힌 거죠. 애를 데리고 한국에 가야 되겠다 싶더라고요."
가족들은 도윤이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당시에는 세계에 몇 대 밖에 없던 에어앰뷸런스를 수소문했다. 마침 중국인이 기장으로 있던 에어앰뷸런스가 베이징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도윤이를 실을 수 있었다. 에어앰뷸런스에 도윤이를 싣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비행기 한 번 띄우는 비용이 5천 만 원이었지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도윤이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비행기 정원은 다섯 명이었다. 기장과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 보호자는 한 명 만 탈 수 있었다.
- 보호자는 어떤 분이 타셨어요?"도윤이가 한 번도 아빠하고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빠가 탔죠. 마지막 여행으로..."
아들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행. 나는 잠시 지금 내 아들과 딱 같은 나이의 누워 잠든 도윤이와 그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먹먹함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아비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지켜보느라 질문을 멈춰야 했다. 서울에 도착한 도윤이는 S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루에 면회가 오전 20분, 오후 20분이었어요. 근데 참 감사한 게요. 슬프고 뭐 아프고, 눈물 나고, 안타깝고 속상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어요."- 저는 제 아들 같으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데요?"그냥 살 거 같았어요. 상처도 없었고 표정도 편안하고. 그냥 그러고 있다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게 은혜였죠. 그런 게 은혜인 것 같아. 그렇게 있다가 갔죠. 8월 28일 날 사고 나고 9월 30일 날 갔나?"
- 장치를 뺀 건가요?"아니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울음은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제가 하나님을 만난 거 같아요."
- 그렇게 도윤이 보내신 건가요?"10월 3일 날 장례식이 끝나고 누웠는데 그때부터 진짜 도윤이가 없는 거예요. 장례식 날까지는 없는 줄 몰랐죠. 근데 이제 딸이 걱정이더라고요. 오빠 사고가 8월 28일 났는데 그 날 아침 열 시에 유학 간다고 자퇴서를 냈어요. 오후 2시에 도윤이 사고 나고. 딸은 자퇴서를 냈으니까 학교에 안 가겠다고. 오빠를 다 아는데 어떻게 학교를 가느냐고. 안 간대요. 오빠가 그 중학교를 다녔으니까."
인터뷰 시간 내내 차분하고 담담했던 강씨가 아들의 사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에어앰뷸런스 이야기에서는 나도 감정이 흔들렸고 눈물이 흘렀다. 잠시 대화를 멈춰야 했다.
- 본인은 유학을 가고 싶어하고요?"너무 가고 싶어 했어요. 근데 저는요. 뭘 결정하려면요. 다른 사람들하고 조금 달라요. 결혼할 때도 그랬고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저는 항상 메모를 해요. 할 수 있다, 없다를요. 눈으로 확인해야 해요."
- 딸 유학 문제도 그렇게 하셨나요?"저는 늘 그렇게 해요. 근데 아빠가 못 보내겠다니까 못 가는 거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그래 사실은 먼저 간 아들도 보고 싶었고요. 어떡하면 애를 내가 만날 수 있지? 만나야 되고, 보고 싶었고, 자존심도 상했어요."
- 자존심은 왜 상하셨어요?"내가 아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 없잖아요. 처음부터 없었으면 관계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충족할 수 있을까 하며 메모를 들여다 봤죠. 예를 들어 일번 공부한다. 예스, 노. 그렇게 51% 예스하면 긍정이에요. 할 수 있다죠. 그렇게 쭉 할 수 있는 일들을 써서 예스 노를 했어요.
근데 다 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에 아들이 방학 때 와서 했던 말이 쓰여 있었죠. 우리 둘 다 유학가면 엄마 뭐해? 그럼 입양해서 애들이나 키우지? 다 못해, 못해, 못해 인데 아이 키우는 거, 이거는 할 수 있을 거 같은 거예요. 그 전에도 아이를 키웠고. 내 직업이 아이 키우는 건데, 보니까 예스더라고요. 그래서 입양신청을 했어요."
- 도윤이 보내고 얼마 만에 결정을 하신 거예요?"삼 일 만이죠. 궁리하다가. 그래서 입양 신청을 했죠."
어이없는 사고로 아들과 사별한 후 머리 풀고 누웠다가 아들의 유언 아닌 유언이 되었던 말을 떠올리며 입양을 결심했던 강명순씨. 아들이 죽은 지 21일 만에 입양을 통해 새 아들을 집으로 맞이하게 된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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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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