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 서서 당당하게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들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입시의 부담 따위는 벗어버리고 마음껏 꿈꾸고 행복해지라고. 경쟁에 열을 올리기 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값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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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임용시험을 열심히 준비하던 나의 매일 아침기도 제목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 교단에 섰을 무렵에는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침마다 아이들과 함께 교문을 들어서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하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그들이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체감하는 좋은 교사의 조건은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수하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 소신을 지키며 살고 싶었지만, 당장 진학에 목숨을 거는 고3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을 대하면서 교육적 가치에 대해 많은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유능한 선생님'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굴복한 나는 능숙하게 입시를 지도하는 선생님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내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은, 어느 날 문득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곁에 다가오는 아이들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진학상담'이란 이름으로 이야기를 나눈 아이들은 내 앞에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죄인이 되어갔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란 고작 헛된 꿈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 그 말의 숨은 뜻은 눈높이를 낮추고 형편에 적절한 대학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꿈을 포기하란 말을 거듭하는 교사에게 어떤 학생이 애정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교사와 학생에게 소통과 공감이 가당키나 한 것이겠는가?
이후 나는 학교를 전문계로 옮기게 되었다. 학업과 입시에 대한 부담을 훌훌 벗어버리고 내가 꿈꾸었던 교육을 실현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저것 고군분투하던 나는 결국 만신창이가 된 채, 좋은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결론만 내리게 되었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데, 환경을 바꾼다고 달라질게 있는가라는 좌절감에 시달리며 내 자신의 무능력함에 통렬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나에게 교직은 더 이상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다.
이렇듯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던 나의 일상에 숨구멍을 열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도 읽기 싫어하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였다. '노력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졌던 마음도 추스를 수 있었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이제껏 고민해왔던 문제의 원인이 나 개인의 능력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연대와 조직의 부재'였던 것.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한 개인, 개인의 노력은 결코 산술적인 합(合)의 결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력의 결실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할 뿐이다.
진정 사회와 환경을 바꾸고 싶다면 한 개인과 개인이 연대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시스템을 조직할 것, 그리고 그 누구도 탈락하지 않도록 안전망을 구축해 줄 것, 그리하여 능력이 탁월한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자기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줄 것.
공동체는 각 개인의 노력의 결과의 합보다 훨씬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교육 문제의 해결방법도 결국은 연대와 신뢰의 문제였던 것인가. 이제껏 내가 추구했던 방법이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이 나에게 던진 화두는 바로 이것이었다. 변화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신뢰를 구축하고 연대하라! 한 개인의 힘은 미약하다. 그러나 연대의 힘은 한 사회를 변화시킬 만큼 충분히 강하다.
나에게도, 출근길 가벼운 발걸음이 있었으면 좋겠다언제인가부터 나는 젊은 선생님의 열정과 즐거움이 너무나 부러웠었다.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날마다 기대된다는 독서모임의 한 선생님. 아침 출근길에 버스 안에서 만나는 그 선생님의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가 어려 있다. 그런 미소에 끌리기라도 한 것일까? 세 정거장 만에 끝이 날 여정이건만 등교길 버스 안 아이들은 선생님 주변에 모여들어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자신을 어필하기에 바쁘다. 버스 한 켠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도, 출근길 가벼운 발걸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교사라서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교단에 서서 당당하게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들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입시의 부담 따위는 벗어버리고 마음껏 꿈꾸고 행복해지라고. 경쟁에 열을 올리기 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값진 것이라고. 네가 인생의 행로에서 잠시 멈칫해도 이 사회가 꿈을 다시 찾을 때까지 너를 안전하게 보살펴 줄 거라고.
'너는 이상주의자에 불과해. 항상 잡지도 못할 뜬 구름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지. 현실은 달라. 남보다 앞서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될 뿐이야. 이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낙오자가 될 뿐이라구. 현실에 출구 따위는 없어. 아이들을 순진한 바보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이런 사실에 대해 똑바로 이야기해.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로 아이들 머릿속만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라고 밀어붙이는 현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이 현실로부터의 탈출, 상상만으로도 통쾌하다. 출근길 발걸음이 마냥 상쾌해 질 것만 같다.
얼마 전 우리 학교 아이들이 경기도 교육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이 아이들은 교육봉사동아리(DUO)의 일원으로 장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교육봉사도 해가며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가고 있는 이 아이들. 진로를 준비하다가, 아마도 교육감님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가 보다.
당돌하고도 유쾌한 이 아이들의 그 행보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교육감님이 흔쾌히 우리 학교를 방문하기로 답을 주셨다. 여러 아이들이 도교육청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덜 번거롭지 않겠느냐며. 뜻밖의 사태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어린 눈빛으로 이 사건의 결말을 지켜보기를 원했었다.
안타깝게도 5월 마지막 주, 메르스가 확산되면서 교육감님의 방문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건전한 호기심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내가 꿈꾸는 교육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이라면, 권위의 벽이라는 사회적 편견 따위를 초월해버린 이 아이들의 유쾌하고 당돌한 호기심에 그 해답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와 교육의 미래를 만들어 갈 귀한 아이들. 이 아이들이 교단에 섰을 때, 지금 보다는 조금 더 나은 여건에서 교육자로서의 포부를 실현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다. 덴마크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거듭났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육이 큰 밑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급하지 않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갈 것이다. 뜻을 모아 함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오연호 지음,
오마이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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