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9산선문의 한 곳인 봉암사 (가운데) 최치원이 나라를 개혁할 수 있는 방안을 써서 진성여왕에게 제출했던 상서장 (오른쪽) 봉황대
정만진
관리들 또한 나라를 걱정해 함께 머리를 맞대는 열정이 없었다. 진성여왕은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 편찬 등 사상 통일에 힘썼지만,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당에서 이름을 떨치다가 귀국한 최치원이 894년 경주 상서장(上書莊) 자리에서 진성여왕에게 나라 개혁 방안을 써서 올리지만 그것도 진골들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결국 신라 말기 권력층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의 멸망에 한몫하는 풍수지리 사상앞서 언급했지만, 대구 경북에 남아 있는 선종 유적의 대표는 문경 봉암사이다. 그런가 하면, 도선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대표 유적으로는 구미 금오산의 도선굴을 들 수 있다. 이 굴은 금오산성 대혜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나오는 대혜폭포 오른쪽 절벽 복판에 있는데, 고려 말 삼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가 숨어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주의 봉황대도 도선 유적이다. 왕건은 신라와 친한 척하고 지냈지만, 언제 멸망시킬 수 있을까 줄곧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도선에게 그 비책을 물었다. 도선은 "서라벌은 배의 형상이니 가운데에 무거운 것을 얹으면 가라앉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왕건은 자주독립파, 견훤파, 왕건파 등으로 분열돼 있는 신라 지배층 중에서 왕건파들에게 "서라벌 한복판에 커다란 무덤을 조성하라"고 시켰다. 아주 무거운 것을 서라벌 복판에 얹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봉황대가 생겨났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새로 생겨난 모든 것이 자라다가 언젠가는 없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 나라들도 없어졌다. 그러나 없어지는 모양새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분열, 그리고 부패가 중요 원인이었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 지난 역사에서 배울 것은 없는지 철저하게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