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멸망에 한몫한 도선의 말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 25] 삼국의 소멸, 발해의 흥망

등록 2015.07.21 14:50수정 2015.07.2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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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북한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풍경. 고층 건물들 뒤로 만주 벌판이 펼쳐진다. (2010년 촬영 사진)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북한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풍경. 고층 건물들 뒤로 만주 벌판이 펼쳐진다. (2010년 촬영 사진)정만진

대구와 경북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과 관련되는 유적을 찾기는 어렵다. 견강부회로 갖다 붙인다 해도 두 나라의 멸망과 연관이 있는 인물, 즉 김유신 등의 유적을 거론하는 게 고작이다. 따라서 발해의 멸망과 관련되는 유적은 더더욱 있을 리 없다. 백두산 등 만주를 찾아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발해의 근거지는 만주 일원이다. 대조영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이 698년 발해를 건국한 곳도 만주 동부 지역이었다. 하지만 발해는 3대 문왕(737∼793)에 이르러 당과 대등한 지위에 올라섰다. 그 증거가 바로 독자 연호의 사용이다. 당은 발해가 눈엣가시처럼 미웠겠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었으므로 선왕(818∼830) 시기의 전성기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부르며 대우했다.


고구려 계승국을 자부한 발해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을 자부했다.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스스로 '고려 국왕'이라 부르고, 고구려처럼 온돌과 연꽃 무늬가 든 기와를 썼으며, 고분의 내부 구조도 같다. 중앙 정치 조직을 당의 체제처럼 3성 6부로 구성하기는 했지만, 명칭과 운용 방식은 독자적이었다.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관리했고, 10위의 중앙군을 두어 왕궁과 수도를 지키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별도의 지방군과, 국경 요충에 독립된 부대를 배치했다.

 용정중학교 교문 옆 게시판에 학생들이 분필로 그려놓은 백두산 폭발 장면(2010년 촬영 사진)
용정중학교 교문 옆 게시판에 학생들이 분필로 그려놓은 백두산 폭발 장면(2010년 촬영 사진)정만진

그러나 10세기 초 이르러 발해는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진격해오는 데다, 내부 권력 투쟁이 심화되면서 차차 약해진다. 결국 926년, 230년가량 이어오던 발해는 거란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

자취도 없이 사라진 발해, 백두산 때문?

발해는 거대 강국이자 문명국이었는데도 역사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너무 쉽게 거란에게 멸망 당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백두산 천지(2010년 촬영 사진). 백두산이 대대적으로 폭발하는 바람에 발해가 파묻혀서 사라졌다는 견해도 있다.
백두산 천지(2010년 촬영 사진). 백두산이 대대적으로 폭발하는 바람에 발해가 파묻혀서 사라졌다는 견해도 있다. 정만진

발해의 구성원은 대부분 말갈족이었지만,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민족 사이에는 완전한 통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결국 발해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말기에는 귀족끼리 치열한 권력 투쟁에 매달렸다. 부족을 통일한 거란족이 쳐들어오는 상황에 내부 구성원끼리 싸우고 있었으니 패망은 필연이었다.

부패와 분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


고구려도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끝도 대동소이했다. 부패가 극심해진 신라 말기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적 통일도 사라진 상태였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업(業) 사상을 뛰어넘는 선종(禪宗)이 호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문경 봉암사 등 9산선문의 선종 승려들은 호족 세력과 결합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앞장섰다. 특히 도선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에 근거, 경주 아닌 다른 곳에서 왕이 배출된다는 믿음을 세상에 퍼뜨렸다.

 (왼쪽) 9산선문의 한 곳인 봉암사 (가운데) 최치원이 나라를 개혁할 수 있는 방안을 써서 진성여왕에게 제출했던 상서장 (오른쪽) 봉황대
(왼쪽) 9산선문의 한 곳인 봉암사 (가운데) 최치원이 나라를 개혁할 수 있는 방안을 써서 진성여왕에게 제출했던 상서장 (오른쪽) 봉황대정만진

관리들 또한 나라를 걱정해 함께 머리를 맞대는 열정이 없었다. 진성여왕은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 편찬 등 사상 통일에 힘썼지만,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당에서 이름을 떨치다가 귀국한 최치원이 894년 경주 상서장(上書莊) 자리에서 진성여왕에게 나라 개혁 방안을 써서 올리지만 그것도 진골들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결국 신라 말기 권력층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의 멸망에 한몫하는 풍수지리 사상

앞서 언급했지만, 대구 경북에 남아 있는 선종 유적의 대표는 문경 봉암사이다. 그런가 하면, 도선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대표 유적으로는 구미 금오산의 도선굴을 들 수 있다. 이 굴은 금오산성 대혜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나오는 대혜폭포 오른쪽 절벽 복판에 있는데, 고려 말 삼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가 숨어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주의 봉황대도 도선 유적이다. 왕건은 신라와 친한 척하고 지냈지만, 언제 멸망시킬 수 있을까 줄곧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도선에게 그 비책을 물었다. 도선은 "서라벌은 배의 형상이니 가운데에 무거운 것을 얹으면 가라앉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왕건은 자주독립파, 견훤파, 왕건파 등으로 분열돼 있는 신라 지배층 중에서 왕건파들에게 "서라벌 한복판에 커다란 무덤을 조성하라"고 시켰다. 아주 무거운 것을 서라벌 복판에 얹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봉황대가 생겨났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새로 생겨난 모든 것이 자라다가 언젠가는 없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 나라들도 없어졌다. 그러나 없어지는 모양새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분열, 그리고 부패가 중요 원인이었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 지난 역사에서 배울 것은 없는지 철저하게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도선굴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풍경. 도선굴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도선대사가 득도를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굴은 야은 길재가 숨어지낸 곳으로 더 유명하다.
도선굴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풍경. 도선굴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도선대사가 득도를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굴은 야은 길재가 숨어지낸 곳으로 더 유명하다.정만진

#발해 #도선굴 #길재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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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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