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거리도로를 하얗게 둘러 친 저 벽에 기대 한참을 서 있었다. 바다를 보며.
황보름
과거의 미술학도와 미래의 필라테스 강사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섰고, 체크 아웃 시간에 맞춰 천천히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며 뭔가 분주해 보이는 중국인과 몇 마디 대화도 나눴다. 어젯밤 2층 침대 내 위에서 잠을 잤던 중국인은 제주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는데, 심지어 중국인은 조만간 이 제주 땅 어딘가에서 '페스티벌'이 열릴 것이고 자기는 그 페스티벌에 참가할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기를 포함한 많은 중국인은 무려 그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거였다. 그게 도대체 무슨 페스티벌인지 참 궁금했지만, 그것보단 먼저 다른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금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껏 이 한국땅에서 페스티벌이란 델 참가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나보다 한발 앞서 한국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뭔가 헛산 느낌을 안고 그게 무슨 페스티벌인지 물었다. 그러자 중국인이 얇은 책자 하나를 건네줬는데, 그 책자엔 한문이 가득했고 읽을 수 있는 건 오직 10km라고 쓰인 숫자와 기호 조합뿐이었다. 중국인이 말하는 페스티벌은 그냥 함께 모여 쭉 걷는 행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페스티벌이라면 나도 참가를 했던 기억이 있긴 한데… 암튼, 별로 당기진 않는 페스티벌이라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너무 분주해 보여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두고 그냥 내 일을 하면서 살짝살짝 그녀가 뭘 하나 흘긋 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가 뭔가를 물으면(대체로 '이곳에 어떻게 갑니까?' 같은) 길 찾기 앱을 통해 가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녀는 펜을 들고 메모를 해가며 아주 열심히 오늘 갈 곳의 위치를 파악하고 가는 방법을 꼼꼼히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여행용 가방을 쾅 닫고 침대 밑에 쑥 넣더니 정리하던 것들을 손에 쥐고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좀 섭섭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도 튼 사인데 인사라도 하고 가지.
어제 만난 한국말을 잘하던 대만인은 이 중국인보다 훨씬 더 친절했다. 나갈 때는 잘 있으라는 인사말도 건네줬었고. 그녀는 우리나라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제주는 이번이 세 번째 여행이었는데, 어제는 대만에서 가족들이 제주로 첫 여행을 오는 날이라며 들뜬 표정을 보여 줬었다.
그녀는 제주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나는 대만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이 없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떨결에 그녀에게 '리다런'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 버렸다. 리다런? 그녀는 리다런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왜 리다런을 모르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으로 리다런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대만드라마를 검색해 보여주었다.
"대만드라마를 몇 편 봤는데 그중 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인 리다런을 좋아해"라고 말하자 그녀는 반색하며 천천히 리다런, 하고 발음해 주었다. 리다런? 듣고 리다런, 하고 다시 발음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리다런, 했고 나도 다시 리다런, 했다.
역시 착한 그녀는 아무렴 어때하는 표정을 짓고는 내 발음을 고쳐주는 대신 모르던 우리나라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하나 알려주었다. 그렇게나 좋아한 리다런이 나온 그 대만드라마를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해 곧 방영할 거라는 고급 정보였다. 주인공은 하지원과 이진욱이 될 거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대만 소녀의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제주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 주 하지원과 이진욱이 나오는 드라마가 정말 시작되었다.
대만인도 어제 떠났고, 중국인도 방금 떠났고, 나도 체크아웃을 했다. 여행용 가방에서 가장 무거운 물건 몇 개를 꺼내 가방에 꽉꽉 눌러 넣은 터라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데도 허리가 지끈했다. 다행히 버스정류장은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 있었다.
삼십 분 정도를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짐칸에 짐을 넣어도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다시 한 번 무시 되었다. 당황하지 않고 여행용 가방을 번쩍(은 아니고 간신히) 들어 올려 당당히 버스에 입성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내가 자리도 잡기 전에 힘차게 엑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어렵게 중심을 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버스 창밖으로 제주 시내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용 가방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준 채 버스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조금만 더 달리면 바다가 보일 거였다.
숙소 옮기며 4인실 예약했는데... 이런 횡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