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연구자인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김시연
"운이 나빴든 실력이 나빴든 실패하고 있을 때 이재용 부회장이 물러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겠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평가해달라는 '완곡한' 질문에 '재벌 전문가' 김진방(58)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바로 '정곡'을 찔렀다. 삼성의 미래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능력이 아니라, '소유'와 '지배'의 분리에 달렸다는 것이다. 능력이 있든 없든, 삼성 경영에서 손을 떼라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삼성물산 합병, 국민연금과 법원이 결정적 역할"삼성물산 합병 주주총회 하루 전인 지난 16일 오전 인천시 남구 용현동 인하대 교정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일찌감치 '이재용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판돈(보상)이 똑같다면 난 합병 성사 쪽에 돈을 걸겠다. 국민연금과 사학연금이 그쪽으로 정했듯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정치적, 금전적 이유로 삼성, 아니 이재용 손을 들 거다. 공적 연기금은 국민 정서, 특히 지배층 분위기를 반영해 정서적 판단을 할 테고, 민간 기관투자자들은 삼성 계열사가 거래회사여서 주주로서 이익만 따진다거나 수탁자 의무를 지키려고 반대했다가 자칫 거래처를 잃는 '소탐대실'을 염려해서다. 심지어 해외 기관투자자도 (삼성과의) 암묵적인 거래나 실제적인 거래로 합병 찬성으로 돌아설 수 있다."실제 다음날 주총에선 찬성률 69.53%로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이 통과됐다. 합병 승인에 필요한 2/3(66.67%)는 넘겼지만, 2.8%포인트 차에 불과했다. 국민연금이 아니었다면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관련기사: 삼성 "실망 안시키게 잘하겠다"... 엘리엇 "모든 가능성 열어놨다").
김 교수는 17일 주총 결과가 나온 직후에도 "법원의 자사주 관련 판결과 국민연금의 찬성 결정이 컸다"라고 평가하면서 "거꾸로 이 두 가지는 앞으로 계속 논쟁거리로 남게 돼 삼성이 지주회사로 넘어가는 과정을 지연시키고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생명 지분 인수 과정에서) 결국 상속세를 내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런데 '날고 긴다'는 세계적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이런 '뻔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일까?
"엘리엇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국민연금이 저렇게 쉽게 찬성으로 돌아서 버리고 법원 자사주 판정에서 어긋나 버렸다. 적어도 자사주 문제는 엘리엇이 낙관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자사주 매각 불법이라는 데 베팅했다."
삼성물산은 지난달 5.9%에 이르는 자사주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백기사' KCC에 넘겼다. 자사주는 주가 방어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지분이 낮은 재벌 총수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에 엘리엇도 자사주를 우호적인 제3자에게 매각한 건 불법이라며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지만 1심 법원은 기각했고 이날 2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관련기사:
엘리엇 대신 삼성 손 든 법원... 팔은 안으로 굽는다?)
-현행법에 자사주 매각 관련 규제 조항이 없는 탓 아닌가."법에 없더라도 법의 정신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지금까지 판례도 엇갈렸다. 자사주 매각을 신주 발행과 같은 거로 본다면 제3자에게 배정해선 안 된다. 자사주도 금고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새로 찍는 거나 다를 게 없다. (법리를 다투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법원 판단을 팔이 안으로 굽은 결과로 볼 수 있나."법원은 그동안 지배주주 편향적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법을 대단히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결정이 판례로 굳어지면 몹시 나쁜 제도가 하나 만들어지는 셈이다. 지금까지 자사주 매각은 '대표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이 아니었다. 모호했는데 이번 판결로 확실한 수단이 돼버린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비롯한 재계에서는 오히려 외국자본의 공격에서 국내 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대주주 지분에 더 많은 의결권을 주는 '차등 의결권'이나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싸게 지분을 매입할 권리를 주는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 일종의 경영권 방어 수단)' 같은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하라고 여야 정치권을 압박했다. '포이즌 필'은 이미 지난 2010년에 도입하려다 국회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미국에서 포이즌 필은 새로운 대주주가 전문 경영인을 교체하는 걸 막으려고 도입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소수 지분을 가진 대주주'(소수지분지배주주)에게 새로 등장하는 대주주를 막을 수단을 주자는 것이다. 기존 경영진이 교체될까 봐 하는 게 아니라 '소수지배주주'가 위태로우니까 무기를 주자는 것으로 (재벌 총수 견제를 막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국적자본 대 해외투기자본? 재벌 지배력 강화하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