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엔 지금 비오는 중
황보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아직은 오지 않는다. 대신 하늘엔 회색빛 구름이 가득하다. 구름이 마치 커다란 돔처럼 제주를 꼼꼼히 감싸고 있다. 곧 빗방울이 떨어지려나 보다. 오늘은 달리기를 쉬기로 했다.
어제 저녁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간 안 쓰던 몸을 지난 며칠 너무 써버린 탓이다. 아침엔 뛰고 하루 종일 걷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걷기를 원래 좋아하고 또 달리기도 미리부터 시작했던 터이지만 그래 봤자 며칠 걸러 한 번씩 뛰고 걸었을 뿐이다. 여행자가 되어 매일 뛰고 걷자니 몸에 무리가 온 듯 했다. 그러던 차에 비 소식을 들은 거였다. 마음 편히 달리기를 '패스'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여행마저 패스할 수는 없는 일. 아침을 먹고 남사장님과 오늘 어디를 갈지 상의했다. 맛 좋은 커피를 홀짝이며 나는 남사장님의 손가락을 따라 지도 위 여기저기를 미리 여행해 보았다. 사장님은 비가 오는 날 가면 좋을 몇 곳을 꼽아 주었다. 친절한 설명도 함께. 사장님이 꼽아준 곳은 주로 숲이었다. 사려니 숲, 비자림, 몇 군데의 곶자왈. 그리고 숲이 아닌 만장굴. 나는 만장굴이 괜찮을 것 같았다. 간 김에 그 근처에 있다는 미로공원에도 들러보면 좋을 것 같고.
기분 좋게 일정을 짠 후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엔 음산한 구름이 가득했고 공기도 구름의 기운을 따라 음산했다. 후드드득, 비가 우산을 연신 때려댄다. 우산을 때리지 않은 비는 기어코 바람을 타고 우산 안으로까지 치고 들어와 나를 때려댄다. 몇 분 걸었을 뿐인데 옷이 흠뻑 젖었다.
만장굴로 가기 위해선 우선 제주 시내로 나가야 했다. 제주 시내에서 만장굴로 가는 버스는 990번 하나라고 했다. 나는 비에 젖은 몸을 이끌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한눈 팔았다고 혼내는 버스기사 아저씨, 왠지 좋았다미리 말하자면 나는 이 날 만장굴에 가지 못했다.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 버스노선과 버스 배차 간격을 나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다는 사실도 자꾸 잊어버렸다.
습관적으로 버스정류장에 가면 바로 버스가 올 줄 알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기 일쑤였다. 내가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제주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둘. 두 버스의 배차 간격은 1시간이었다. 운이 나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 하지만 평균적으로 30분 정도 기다리면 버스는 왔다.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을. 나는 매번 조급증이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언제 버스가 오나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오매불망 님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렇게 고개를 쭉 내밀고 버스를 기다리는 행동은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에선 매우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어느 게스트하우스 스탭은 이렇게 귀띔해주었다.
"제주에서 버스를 탈 때는 꼭 버스가 오는 방향을 보고 있다가 버스가 가까이 왔을 때 운전기사아저씨와 눈을 마주쳐야 해요.""아니, 어떻게 눈을 마주쳐요. 그리고 왜요?""눈을 마주칠 수 없으면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가 손을 흔들어야 해요. 택시를 탈 때처럼.""아니, 왜요?""안 그럼, 그냥 지나가니까요."그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 버스가 버젓이 그 버스 하나만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그저 수줍은 듯 서 있기만 하면 버스는 그냥 지나갈 거라는 거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명 과장 된 말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지도 않고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버스가 쏜살같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딴 곳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이 버스를 놓치면 또 삼십 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택시를 부르듯 손을 흔들며 버스를 따라 달렸다. 다행히도 버스는 서주었고, 나는 무사히 탈 수 있었지만, 대신 나는 버스기사 아저씨한테 혼이 나야만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 눈을 팔면 어떻게 합니까!""죄송합니다."'다신 그러지 않을게요'라고 속으로 뉘우친 후 넘어지지 않으려 얼른 눈에 보이는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때쯤 나는 버스기사 아저씨들의 카리스마에 기가 단단히 눌려있었다. 그렇다, 제주 버스기사 아저씨들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처음엔 버스를 타기가 조금 불편했다. 기사 아저씨들이 너무 불친절한 것 같아서. 버스도 너무 험하게 모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급 출발을 하는 통에 넘어지지 않으려 매번 애를 써야 했다. 앉아 있어도 손잡이를 꼭 잡고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서서히 나는 카리스마가 있는 버스기사 아저씨들이 그냥 참 편해졌다. 계속 타고 다니다 보니 기사아저씨들이 그냥 제주도민같이 느껴졌다. 가끔은 버스를 탄 동네친구와 내내 잡담을 하며 가는 기사아저씨도 있었다. 친척을 만난 아저씨도 있었고 말이다.
차라리 이게 나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간 너무 과도한 친절에 익숙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너무 서비스를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던 통에 누가 조금만 불친절해도 신경이 곤두섰던 건 아닐까. 누가 나를 좀 불친절하게 대한들 그게 뭐 대수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게 기사 아저씨들에게 편한 일이라면 그게 내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싶었다. 억지 친절, 억지 미소는 아픔을 동반한다. '먹고사니즘'이 만들어놓은 부자연스러운 서비스는 결국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게도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마련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먹고사니즘'은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이니까 말이다.
3년 전 오스트리아 미술사 박물관에 갔었을 때가 기억난다. 입구 매표소에서 표를 팔고 있던 뚱뚱한 오스트리아 할아버지는 내가 그때껏 만난 모든 매표원들 중 가장 불친절했다. 내가 돈을 내고 표를 받고자 서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하단 표정이었다. 드디어 건네주는 표를 조심스레 받아 들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다. 저렇게 굴면 금방 잘리고 말겠지.'
하지만 오스트리아 할아버지는 이런 걱정 없이 본인의 성격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보며 난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그 많던 포장된 웃음들을 떠올렸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차라리 누군가의 불친절을 감내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기 위해 표정을 포장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픔과 슬픔을 보기 보다는.
뭐,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던 탓에 나는 제주버스기사 아저씨들의 불친절함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물론, 버스는 좀 조심히 몰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간절하다. 이건, 안전의 문제이니까. 어찌됐건, 역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고됐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비가 오늘 날에는.
버스 놓치고 찾은 극장,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삼십 분 넘게 빗속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어제 저녁부터 느껴진 피곤함이 몰려왔다. 기온도 급격히 떨어져 반팔에 난방, 점퍼까지 입었는데도 몸이 으스스했다. 그래도 오는 버스를 반갑게 맞았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달려 제주 시내에 도착했다. 990번 버스가 지나간다는 버스 정류장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십분, 이십 분, 삼십 분이 흘렀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나는 문득 든 생각이 있어 급히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아, 이런, 바보같이 이걸 지금 알게 되다니. 990번 버스는 제주 시내에서 하루에 딱 두 번 출발하는데 이미 아침 일찍 두 대가 다 지나가버린 듯 했다. 그렇다는 건 나는 오늘 만장굴에 가지 못한다는 건데!
길찾기 앱만 믿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길찾기 앱에는 가는 방법만 나와 있지 그 외의 정보는 나와있지 않았다. 이젠 어쩐다. 그런 그렇고, 너무 추운데. 내 한심함을 자책만 하고 있기에는 날이 너무 쌀쌀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만장굴은 빨리 포기하고 우선 어디든 들어가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기 앞에 극장이 하나 보였다. 그렇게 나는 올해 처음으로 극장에 가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990번 버스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영화를 기다리며 나는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아는 남사장님의 얼굴과 남사장님이 몰고 다닐 차를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사장님은 당연히 내가 차가 있는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걷는 여행 중이랬으니. 하지만 순간적으로 착각했었을 수는 있겠지. 사실, 택시를 타면 갈 수는 있으니까. 사장님을 원망하지는 말자. 다 내 탓이지, 뭐.
영화가 한 시간 뒤에 시작된다고 해서 극장 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오늘 일정을 다시 짜보았다. 아무래도 시내를 벗어나긴 힘들 것 같아 근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찾아보았다. 검색 몇 번 만에 금방 갈 곳이 두 곳이나 생겼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삼성혈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뭔가 지루해 보이는 이 장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이번 제주 여행의 색깔도 조금은 달라졌겠지. 나는 이 두 곳에서 알게 된 과거의 제주를 통해 현재의 제주를 조금 더 밝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오늘처럼 이렇게 망가진 상황 속에서도 뜻밖의 의미 있는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한다.
피곤함이 싹 달아날 정도로 시원한 영화였다. 그런데 제주도민들도 나만큼이나 극장엘 자주 오지 않는 걸까. 주말 점심때인데도 불구하고 극장은 거의 텅 비어있어 아주 쾌적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결국엔 민중이 승리를 거두는 <매드맥스>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기분 때문인지 이제는 비에서도 음산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약간 우울할 뿐이다. 나는 애써 우울을 털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우울이 오늘의 나를 깊이 감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향기나는 서각, 나 혼자 누리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는 제주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었다. 세계자연유산 홍보전시관과 해양종합전시관을 포함, 자연사전시실, 민속전시실, 특별전시실 그리고 시청각실이 커다란 박물관 안에 들어서있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만장굴을 본떠 만든 자연사전시실 통로가 보였고(만장굴이라니, 왠지 반가웠다), 거기서부터 길을 따라 죽 걸으며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청각실 앞에 다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