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도 힘 못 쓴, 온몸 세포 깨운 '천년 숲'

[30일, 제주를 달리다 9] 그 일곱째 날②

등록 2015.08.07 16:30수정 2015.08.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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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학생들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버스로 향했고, 나는 비자림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30분 정도를 달리자 비자림에 도착했다. 뜨거운 햇볕은 만장굴에서부터 줄곧 나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뜨거운 열기가 확 낚아챈다. 가능하다면 다시 만장굴 속으로 도망가 버리고만 싶은 열기였다. 이런 햇볕이라면 비자림을 걷는 것도 고역이 될 게 뻔했다. 햇볕 때문에 입구까지 가는 데도 한세월이 걸리는 것 같았다.


비자림은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삼림욕장을 말한다. 이곳에는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단일수종으로 이루어진 숲으로는 세계 최대규모라고 한다.

비자림에는 '천년 숲'이라는 별칭도 있다. 그 이유는 숲의 가장자리에 뿌리를 박고 있는 할아버지 비자나무 때문인데 이 나무의 나이는 820살, 키는 14m, 가슴둘레 6m에 달한다고 한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사실 비자림은 1970년대만 해도 호랑이가 나올까 봐 겁이 났을 정도로 원시적인 숲이었다. 그런데 1999년 숲 가꾸기 사업 대상이 된 후 다른 나무들은 제거하고 비자나무만을 남겨 육성한 끝에 지금 우리가 마음 놓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삼림욕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비자나무의 이름은 왜 비자가 되었을까. 잎 모양이 한자 비(非)를 닮아서라고 한다. 이름 자체가 생김새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비자림의 향기와 에너지에 취하다


 비자림 입구.
비자림 입구. 황보름

억지로 입구까지 다다라 표를 끊고 기대감 없이 비자림으로 쏙 들어갔다. 너무 더우면 한 바퀴나 쓱 돌아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구에 들어서자 온몸의 세포가 환호성을 지른다. 이 향기,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이지?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기가 우아하고 매력적인 숲의 세계로 들어선 나를 축복해주고 있는 듯했다.

걱정과는 달리 2800여 그루의 나무들이 햇빛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그 밑을 걷는 인간들에게 시원하고 상쾌한 그늘을 선물하고 있었다. 이런 길이라면 몇 시간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내가 타고 갈 버스는 4시 이후론 2시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으니 마침 잘됐다. 앞으로 2시간은 넘게 이곳에서 걷고 또 걸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


젊은 부모와 유모차 안의 아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녀 딸, 엄마와 아들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친구들이 숲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고 있을테지! 내가 그랬으니까. 나 역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마음 속으로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줬으니까.

 비자림 길
비자림 길 황보름

상쾌하고 향기로운 길 위에 선 나는 나뿐 아니라 타인의 건강과 행복도 빌어줄 아량과 의지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혹시, 이곳 비자림에는 우리 안의 선한 마음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 혹시,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아니면 바닥에 깔려 있는 송이가?

어찌됐건, 내가 지금 선해진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몇 명을 여기로 좀 데리고 오고 싶었다. 아니 몇십 명. 아니, 이왕이면 우리 모두다. 우리 모두가 나만의 행복, 나만의 이익만을 외치는 옹졸한 마음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 타인의 행복까지 아우를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지니게 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너무 큰 욕심이라면, 이곳 비자림에서만이라도.

탐방로를 덮고 있는 화산 쇄설물 송이(Scoria)를 밟고 걸으며 나는 한껏 몸을 폈다. 팔도 죽죽 늘려보고, 다리도 쫙쫙 펴보고. 왠지 이러면 피톤치드가 온 몸에 더 잘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원을 담은 돌탑들
소원을 담은 돌탑들황보름

그러다가 아기자기한 돌탑들을 만났다. 돌이 있는 곳이면 의례 세워지곤하는 돌탑. 사람들의 소망을 담고 의젓이 서 있는 돌탑들을 보며 나도 귀여운 3층 돌탑을 하나 세웠다. 그리곤 소원을 빌었다. 나는 지금 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를 위한 소원을 빌진 않았다. 나는 이날 정말 세계 평화와 사회 정의를 빌었다.

비자림을 천천히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가기 싫은 마음이 컸지만 버스 배차 간격이 떠오르자 발이 저절로 속도를 낸다. 오늘은 아침부터 꽤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도 별로 피곤하진 않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면 근처 세화 해변도 잠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햇빛을 막아주고 있는 고마운 나무
햇빛을 막아주고 있는 고마운 나무황보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 '양'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짐 정리를 하던 예쁘장한 룸메이트가 밝은 목소리로 '헬로'라며 인사를 건넨다. 나도 '헬로'라고 인사한 후 그녀에게 중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말했다. 상대의 밝은 성격 때문인지 우리의 대화는 짐을 챙기는 내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앞으로 계속 양으로 부르게 될 그녀와 함께 나는 세화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그녀는 나를 '보'로 부르기로 했다).

이미 저녁은 시작되어 있었다. 사위가 약간 어스름한 것이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양은 이번 제주도 여행이 한국에서의 첫 여행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런데 왜 서울이 아니고 제주를 먼저 온 거야?"
"우선 제주로 오는 게 쌌고, 바다를 보고 싶었어. 내가 사는 충칭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거든."

양은 내게 혹시 충칭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양은 열심히 자기의 고향인 충칭을 설명한다. 가지는 다 털어내고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충칭이란 이런 도시였다. 쓰촨성에 속해 있고, 매우 덥고, 또 매운 음식이 아주 많은 곳. 충칭에 대한 설명을 끝낸 후 양은 쓰촨성은 아느냐고 또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이번에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 쓰촨성이 사천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천성은 알지. 양이 매운 음식 잘 먹는 게 이해 되네. 우리 나라 중국집에선 '사천'이 메뉴 이름에 들어가면 매운 음식이거든. 아마 너희에게서 온 것 같다."
"그래서 난 떡볶이가 맵지 않았어. 서귀포 올레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었거든. 보도 나중에 한 번 먹어봐."

"그래"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나는 제주도까지 와서 떡볶이를 먹을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양의 추천도 있고 해서 나중에 나는 올레 시장을 찾아가 양이 먹었던 그 떡볶이를 먹었다.

세화 해변을 걷는데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등대가 있는 쪽으로 더 걸어가 보기로 했다. 걸어가면서 서로 상대가 학생인 줄 알았다는 덕담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사실 이건 양한테는 별로 덕담이 아니었다. 양은 겨우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번역을 전공했는데, 앞으로 이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
"중국에선 번역가가 되려면 시험을 통과 해야해. 그런데 그 시험이 무지 어려워. 그래서 잘 될지 모르겠어."

양에게 내 처지를 이야기하는 사이 벌써 등대에 다 왔다.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찍히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우리는 시커먼 바다를 아래에 두고 저기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양은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바다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삶은 어떤 색을 지녔을까. 바다가 등대를 찰싹 찰싹 치는 소리에 익숙해질 즈음 우리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온 세상은 무서울 만큼 어둡고 적막했다. 시커먼 상자가 온 세상을 잡아먹은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몇몇 건물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빛은 건물 앞에서 곧 사라져버렸다. 어둠에 겁을 먹은 우리는 각자의 휴대폰에 플래시 앱을 급히 다운받았다. 앱이 비춰주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으며 우리는 겨우겨우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와, 장난아닌데. 양은 이렇게 어두운 거 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처음 봐."

안도감에 웃음을 터트리며 방에 들어서니 짐을 정리하고 있는 또 한 명의 룸메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은 '헬로'라고 인사를 건넸고 그녀도 반갑게 '헬로'라고 인사를 받았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한 순간에 우리 셋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인 그녀가 가방에서 짭짤한 과자를 하나 꺼냈고, 양도 중국 김을 하나 꺼냈다. 그렇다는 건, 우리에겐 술이 필요하다는 얘기!

양에게 한국 전통 술인 막걸리를 마시게 하자며 대동단결된 우리 셋은 플래시 앱을 각자 꺼내 들고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막걸리 두 병을 사들고 게스트하우스 휴식 공간으로 들어서자 미래의 경찰관이 손을 번쩍 든다. 함께 마셔요. 오늘은 왠지 피곤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래서 12시가 넘은 줄도 모르고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제주여행 #비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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