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을 막아주고 있는 고마운 나무
황보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 '양'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짐 정리를 하던 예쁘장한 룸메이트가 밝은 목소리로 '헬로'라며 인사를 건넨다. 나도 '헬로'라고 인사한 후 그녀에게 중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말했다. 상대의 밝은 성격 때문인지 우리의 대화는 짐을 챙기는 내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앞으로 계속 양으로 부르게 될 그녀와 함께 나는 세화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그녀는 나를 '보'로 부르기로 했다).
이미 저녁은 시작되어 있었다. 사위가 약간 어스름한 것이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양은 이번 제주도 여행이 한국에서의 첫 여행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런데 왜 서울이 아니고 제주를 먼저 온 거야?""우선 제주로 오는 게 쌌고, 바다를 보고 싶었어. 내가 사는 충칭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거든."양은 내게 혹시 충칭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양은 열심히 자기의 고향인 충칭을 설명한다. 가지는 다 털어내고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충칭이란 이런 도시였다. 쓰촨성에 속해 있고, 매우 덥고, 또 매운 음식이 아주 많은 곳. 충칭에 대한 설명을 끝낸 후 양은 쓰촨성은 아느냐고 또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이번에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 쓰촨성이 사천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천성은 알지. 양이 매운 음식 잘 먹는 게 이해 되네. 우리 나라 중국집에선 '사천'이 메뉴 이름에 들어가면 매운 음식이거든. 아마 너희에게서 온 것 같다.""그래서 난 떡볶이가 맵지 않았어. 서귀포 올레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었거든. 보도 나중에 한 번 먹어봐.""그래"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나는 제주도까지 와서 떡볶이를 먹을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양의 추천도 있고 해서 나중에 나는 올레 시장을 찾아가 양이 먹었던 그 떡볶이를 먹었다.
세화 해변을 걷는데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등대가 있는 쪽으로 더 걸어가 보기로 했다. 걸어가면서 서로 상대가 학생인 줄 알았다는 덕담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사실 이건 양한테는 별로 덕담이 아니었다. 양은 겨우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번역을 전공했는데, 앞으로 이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중국에선 번역가가 되려면 시험을 통과 해야해. 그런데 그 시험이 무지 어려워. 그래서 잘 될지 모르겠어." 양에게 내 처지를 이야기하는 사이 벌써 등대에 다 왔다.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찍히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우리는 시커먼 바다를 아래에 두고 저기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양은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바다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삶은 어떤 색을 지녔을까. 바다가 등대를 찰싹 찰싹 치는 소리에 익숙해질 즈음 우리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온 세상은 무서울 만큼 어둡고 적막했다. 시커먼 상자가 온 세상을 잡아먹은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몇몇 건물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빛은 건물 앞에서 곧 사라져버렸다. 어둠에 겁을 먹은 우리는 각자의 휴대폰에 플래시 앱을 급히 다운받았다. 앱이 비춰주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으며 우리는 겨우겨우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와, 장난아닌데. 양은 이렇게 어두운 거 본 적 있어?""아니, 나도 처음 봐."안도감에 웃음을 터트리며 방에 들어서니 짐을 정리하고 있는 또 한 명의 룸메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은 '헬로'라고 인사를 건넸고 그녀도 반갑게 '헬로'라고 인사를 받았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한 순간에 우리 셋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인 그녀가 가방에서 짭짤한 과자를 하나 꺼냈고, 양도 중국 김을 하나 꺼냈다. 그렇다는 건, 우리에겐 술이 필요하다는 얘기!
양에게 한국 전통 술인 막걸리를 마시게 하자며 대동단결된 우리 셋은 플래시 앱을 각자 꺼내 들고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막걸리 두 병을 사들고 게스트하우스 휴식 공간으로 들어서자 미래의 경찰관이 손을 번쩍 든다. 함께 마셔요. 오늘은 왠지 피곤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래서 12시가 넘은 줄도 모르고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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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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