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 문학상을 알리는 현상공모 포스터
고흥군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밟는 이들은 흙을 안 만집니다.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이들은 총칼만을 만집니다. 군홧발을 휘두르는 이들 곁에서 펜이나 붓을 들고 아양을 떠는 사람도 있었고, 아양쟁이는 벙어리가 안 되었으나 '제 말'을 할 줄 모르는 쓸쓸한 넋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 듬뿍 떠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 들밥 속에 있고 /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길 잔등에 있다 /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 쩌렁쩌렁 울리는 땅 /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아그라 마을에 가서)흰 블라우스 초록 치마를 받쳐 입고 / 물찬 제비처럼 오월의 라일락 숲속에서 / 노래하는 남도의 계집들아 / 늬네들 모습 너무 이쁘고 환장해서 / 눈물이 날 것 같구나 (井邑詞)팔월 여름에 콩꽃이 피고 집니다. 밭 가장자리나 길가마다 콩이 자랍니다. 그리고, 고흥에서는 돌콩이 어느새 꼬투리를 매답니다. 돌콩은 사람이 심거나 뿌리지 않은 콩입니다. 돌콩은 스스로 꼬투리를 맺고는 스스로 퍼집니다. 바지런한 흙사람은 돌콩이 꼬투리를 맺을 무렵 돌콩을 그러모으는데, 미처 그러모으지 못하면 이듬해에 다시 그 자리에서 새롭게 퍼집니다.
손수 심은 콩을 거두고, 스스로 퍼진 콩을 거둡니다. 콩알을 훑고 콩밥을 짓습니다. 콩밥을 함께 먹고, 콩알이 자란 흙을 새삼스레 어루만집니다. 바로 이 흙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젖줄이요 숨통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흙에 계시고, 나무에 계시며, 바람과 구름과 제비 날갯짓에 계십니다. 그러니, 흙을 빚어 삶을 짓는 사람들 가슴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시지요.
오동나무 잎사귀에도, 후박나무 잎사귀에도, 들밥에도, 샛밥에도, 찬물 한 그릇에도, 샘터에서 긷는 물 한 바가지에도,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봄날에 날풀들 돋아오니 눈물 난다 /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의각시풀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풀이 돋습니다. 풀은 풀바람을 일으킵니다. 풀이 죽습니다. 농약을 맞아서 죽고, 시멘트에 파묻혀 죽습니다. 예부터 시골지기는 풀 한 포기를 함부로 뽑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군홧발과 함께 일어난 새마을운동은 시골지기한테 농약사랑을 심어 주었습니다. 밭둑도 논둑도 소나 염소나 토끼가 먹을 풀이었지만, 이제 시골에서 소나 염소나 토끼를 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공장 같은 짐승우리(공장형 축사)'에서 '항생제가 가득 깃든 사료(공장형 사료)'를 먹는 소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시골사람 스스로 쇠무릎도 모시풀도 쑥도 골풀도 건사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짚으로 이을 일조차 없으니 볏짚을 살뜰히 그러모으지 않습니다. 짚으로 신을 삼지 않으니, 농협에서 내주는 '유전자 건드린(개량형) 난쟁이 볍씨'를 기계로 심어서 기계로 거둘 뿐입니다. 농협에서 심으라고 하는 요즈음 볍씨는 낫으로 베기 매우 어렵습니다. 나락알은 많이 맺힌다고 해도 볏포기가 매우 짧기에 기계가 아니고는 못 벨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