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연구소 이태룡 소장은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1권>과 <통감부래안>을 포함해, 판결문이 있는데도 훈장이 추서되지 않은 의병은 530명이라고 밝혔다(괄호 속 인원은 중복).
이태룡
지역별로 보면, 강원의병 중 판결문이 있는 의병(장)은 77명이지만 41명만 서훈되었고 36명은 아직 서훈되지 않고 있다. 미서훈 중에는 중형을 선고받은 이들도 많은데, 종신징역 1명을 포함해 징역 10년 이상이 17명이나 된다.
인제 출신 김원실(金元實), 횡성 출신 김용원(金溶源)·장명수(張命壽)·장재선(張在善)·정대성(鄭大成)·정욱영(鄭旭永), 홍천 출신 정태용(鄭泰用)은 1907년 8월부터 경술국치 이후까지 양양과 인제·정선 등지에서 활약했고 각각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평강 출신 김윤화(金允華)·박장록(朴長錄) 의병장은 각각 징역 15년과 종신징역을 받았고, 횡성 출신 함재실(咸在實)은 징역 15년을 받았다.
특히 강릉 출신 김성구(金聖九) 의병장은 음성과 원주 등지에서 맹활약했고, 우리나라 재판관이 있던 시절인 '평리원'(일제에 의한 근대적 재판소)에서 판결해 유형 15년을 받았다.
서울 출신은 60명 중 31명이 수훈되었지만, 29명이 남아 있다. 경기도 출신은 186명 중 103명만 수훈자다.
경남의병에 대해, 이태룡 소장은 "1896년 2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진주·사천·고성 세 고을의 의병 수가 1만여 명'으로 기록하는 등 활약이 컸지만, 그들의 재판기록 대부분은 불에 태워지고 남아 있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라며 "다만 평리원과 대구공소원(대구지방법원) 등에서 발견된 10여 명의 판결문으로써 정부가 서훈했지만, 아직까지 7명이 서훈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구·경북의병 가운데도 미서훈자가 많다. 이 소장에 따르면, 청송 출신으로 산남의진에서 활약하면서 청하분파소를 공격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한인 경찰들을 처단했던 박성도(朴成道)는 교수형, 영덕 출신 임한조(林漢祚)와 신낙선(申洛先)은 각각 징역 15년과 10년, 경주 출신 이두만(李斗萬)은 징역 15년, 전술이(全述伊)는 종신징역, 흥해 출신 최산두(崔山斗) 의병장은 종신징역을 받았지만 아직 서훈되지 못했다.
호남의병 가운데 전북의병 201명이 아직 서훈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장은 "당시 수많은 의병들이 숨졌고, 붙잡힌 의병 중에 이름없는 의병은 즉결처분하고, 그들의 전공(?)을 내세울 만한 의병은 재판에 회부했다"며 "판결문이 있는 순창의병은 79명인데, 그중 39명은 서훈되지 않았고, 고창 32명, 정읍 31명, 임실 23명 등 200명이 넘는 의병장·의병들의 공적이 묻혀 있다"고 밝혔다.
판결문이 있는 충청의병은 92명이고, 이 중 56명이 서훈되었고, 36명은 아직도 서훈되지 못하고 있다. 44명의 충남의병 중에서 22명은 서훈되었고, 22명은 아직 서훈되지 못했다. 이 소장은 "이들이 대부분 중형을 받았던 의병장·의병인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강덕보(姜德保)는 청양·온양·대흥 등지에서 맹활약하다 피체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았고, 김흥용(金興用)은 금산·용담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다. 박우일(朴雨日), 박정문(朴正文), 신순종(申舜重)도 활약이 컸던 의병장이었고, 이덕경(李德慶)은 공주의병장으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이들은 아직 서훈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소장에 따르면, 평안도는 4명이 수훈자이고 3명이 미수훈자이며, 함경도는 23명이 수훈자이고 8명이 미수훈자다. 황해도는 6명이 수훈자이고, 6명이 미수훈자이다.
<통감부래안> 수록 의병 34명 미수훈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