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포 광장'만자탑'에서 내려다 본 '캄포 광장'. 9개 콘트라다의 민주적 분권 체제를 상징하는 부채꼴 모양의 광장입니다.
박용은
그 사이 러시아인 연인 한 쌍, 노르웨이인 부부, 고소 공포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영국 여인과 그 연인, 그리고 한국인 한 명에게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두오모'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를 원했는데, '만자탑'의 철골 구조물 때문에 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 같은 사진을 찍어줄 수밖에 없어 조금은 미안했습니다.
'만자탑'에서 내려와 곧바로 같은 '푸블리코 궁전'에 있는 '시립 박물관(Museo Civico)'으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는 과거 시에나의 영광을 상징하는 '시에나 화파'의 프레스코화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4세기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시에나 화파그림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시에나 화파'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세의 끝 무렵인 13세기 말, 시에나의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는 비잔틴 미술의 전통에 고딕 양식을 결합해 매혹적인 색채와 물결치는 곡선, 정밀한 구도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냅니다. 그 후 두치오의 제자이며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림의 작가인 시모네 마르티니가 아비뇽 시절 비잔틴 화풍을 극복하고, 선적인 민감성과 환상적인 정서로 우아하고 화려한 감정을 표현해 시에나 화파의 화풍을 확립하게 되죠. 이른바 '국제 고딕 양식'의 탄생입니다.
이후, 14세기 시에나 화파를 대표하는 로렌체티 형제는 비상한 재능을 보이는데, 형 피에트로는 극적 표정과 심오한 감정의 깊이를 추구했고, 동생 암브로조는 교훈적인 묘사와 시민의 풍속 묘사를 통해 매혹적이면서도 도해적인 화풍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무렵, 피렌체에서는 이미 지오토가 고딕 양식을 극복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15세기 초엔 마사초가 등장해 혁명적 작업들을 통해 르네상스 회화의 시원을 열어갑니다. 하지만 시에나 화파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죠. 여전히 14세기 화풍이 이어졌고, 결국엔 피렌체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도시 시에나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시에나 화파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도시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한 시에나 화파. 그렇다고 시에나 화파가 남긴 미술사적 업적이 폄훼될 수는 없습니다. 14세기 서양 미술사는 곧 시에나 화파의 역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르네상스의 시원을 연 지오토와 마사초의 존재도 시에나 화파의 성과가 바탕이 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