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굴이 아빠 생신 밥상에 차린 카프레제 샐러드.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게, 엄마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었단다. 그러나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배지영
제굴은 인생이 덧없다는 걸 좀 안다. 정규 수업 마치고 탄 만원 버스, 1시간 동안 서서 올 때는 "이렇게 치이면서 꼭 학교 다녀야 해?"라고 한다. 제굴은 가을의 징조를 아는 남자, 그러나 아직은 남성성이 폭발하지 않은 앳된 얼굴. 시장 상인들은 엄마 심부름 온 '애'인 줄 안다. 덜 싱싱한 채소를 권하기도 한다. 요리 경력 4개월 차인 제굴은 그때마다 외롭단다.
8월 29일 토요일, 제굴은 뼛속까지 외로움을 느꼈다. 채소 가게 아주머니가 또 안 싱싱한 토마토를 비닐 봉지에 담아 주었다. 단골로 다니는 정육점은 하필 닫혀 있었다. 다른 가게로 갔더니 가공된 닭 가슴살을 줬다. 맘에 안 든다고 그냥 나오지 못하는 제굴은 신선하지도 않고, 잡내도 나고, 심지어 질기기까지 한 닭 가슴살을 샀다.
"나는 혼자 시장 가는 게 진짜 싫어요. 외로워. 꽃차남(열 살 차이 나는 동생)한테 옷 좀 입고 같이 가자고 말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아빠 생일이니까 새우 튀김 하려고 했거든요.어떤 아줌마는 나한테만 안 싱싱한 걸로 줄 때가 있다고요. 그래도 자연드림(생협) 갈 때는 재밌어요. 자전거 타고 가잖아요. 터덕터덕 걸어갈 때랑은 다르지." 우리 집은 식구들 생일 날에 밖에 나가서 밥을 먹지 않는다. 가풍(그런 게 있다면)이다. 날마다 밥을 하는 남편은 처자식 생일에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진수성찬을 차린다. 나는 그게 스트레스. "여보, 내 생일 때는 내 맘대로 할 거야. 밥 좀 차리지 마"라고 성질을 낸 적도 있다. 그러나 소용없다. 남편은 '밥걱정의 노예'일 뿐이다.
나는 남편 생일이 다가오면 예민해진다. 1년에 한 번, 정식으로 밥상을 차리는 날이다. 미역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는다. 전도 부치고 싶지만 복잡해 보여서 포기. 남편이 전날 미리 해놓은 반찬으로 상을 차린다. 부끄러우니까 밥상 사진은 찍지 않는다. 설상가상! 지난해에는 '분하게도' 미역국이 매웠다. 고춧가루 근처에도 안 가고, 빡빡 씻은 냄비에 끓였는데.
해마다 근심 걱정으로 보낸 남편 생일. 죽으란 법은 없다. 제굴이가 본격적으로 음식을 한다. 나는 한 달 전부터 "네가 아빠 생일상 차려"라고 말했다. 제굴은 "왜요?"라고 물었다. 나는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게 "너 태어나고부터 아빠가 이유식 만들었지, 소풍 도시락 다 쌌지, 날마다 밥해 줬지"라며 자식 된 도리에 호소했다.
"마늘향이 너무 강한 거 아니에요?" 제굴 셰프의 훈수"엄마, 설득력이 약해요.""문상(문화상품권) 1만 원!"
남편 생일 날, '3보 이상 걷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남편은 세상과 타협했다. 지인들의 산악회를 따라서 산에 갔다. 그것도 아침 일찍.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던 제굴이는 "오, 예!" 하며 좋아했다. 반 단합 대회가 있는 날이라서 일어나자마자 놀러 나갔다. 나는 "아빠 생신 밥상 차려야 해. 늦지 않게 와"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날 오후, 제굴은 장을 봐서 왔다. 나는 밥부터 했다. 지난해에 끓인 미역국을 복기해보려고 해도 생각이 안 났다. 작년과 똑같이 동생 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르쳐준 대로 쇠고기를 물에 담가 핏물을 뺐다. 물을 붓고 끓였다. 핏물이 올라와서 걷어냈다. 쇠고기가 푹 끓은 물에 미역을 넣고, 갖가지(이런 애매한 말 같으니라고!) 간을 하면서 끓였다.
"엄마, 다진 마늘 너무 많이 넣고 끓이는 거 아니에요? 마늘 향이 강해요." 제굴은 내 옆에서 감자를 깍둑썰기해 물에 삶았다. 닭 가슴살에 소금, 후추, 바질을 뿌려서 밑간을 해서 구웠다. 햄과 양파를 넣고 볶았다. 제 아빠한테 전화해서는 "어디쯤 왔어요?"라고 물었다. 우와! 상 차릴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서 도착 시간을 알아보다니. 감탄하는 나한테 제굴은 "감자 좀 으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엄마! 이거 뭐예요?""핸드 블렌더로 으깨라며?""폭신폭신하게 으깨야지요. 생크림처럼 됐잖아요. (한숨) 망작이야. 괜찮아요. 주 메뉴 아니니까. 감자전으로 부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