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 시대(1837〜1901)에는 자유방임 경제와 최소 정부라는 신조를 견지하면서, 빈곤을 당사자들의 개인적 결함으로 돌리는 풍조가 일반적이었다. 에드워드 7세 시대(1901〜1910)의 런던은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였다. 인구는 72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빈민가에서는 침대가 충분치 않았다. 어린이들은 바나나 상자 안에 면 누더기와 마직물을 깔고 자야 했다. 어떤 하숙집에서는 침대 하나를 3명에게 대여해 8시간씩 번갈아가며 자도록 했다.
소녀들은 거리에서 몸을 팔아 빈민가를 탈출했다. 예쁜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몸에 눈독 들이는 시장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매춘은 매우 위험한 직업이었다. 사실상 모든 창녀가 매독, 임질 등에 걸려 있었지만 치료약이라고는 수은뿐이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은 유괴되어 외국 사창가로 팔려 나가기도 했다. 일부는 인도와 싱가포르의 사창가로 끌려갔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창가에서는 영국 소녀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양심의 동요' 그리고 부유층의 반발
인종의 쇠퇴를 걱정하는 글이 쏟아져 나오자 정치인들이 긴장했다.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저 아래쪽 깊은 수렁이 아니라 사회 상층부의 '양심의 동요'에서 비롯된 혁명이었다. 혁명 주도 세력은 자유당이었다. 1906년 1월 선거에서 자유당은 선거 사상 보기 드문 큰 승리를 거두었다. 보수당이 157석, 자유당은 377석을 얻었다. 이 선거로 17년간의 보수당 지배가 끝났다.
새로 집권한 자유당은 사회적 평등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실업·보건·주택·교육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국민소득의 더욱 공정한 분배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상공장관 윈스턴 처칠, 1904년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 변경을 긴밀히 협조하면서 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자유주의 안에서의 이런 새로운 흐름은 '신자유주의(New-Liberalism)'로 불렸다. 1970년대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1908년에는 노령연금법안이 제출되었다. 노령연금법안은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일정한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으로, 비록 지급 액수는 많지 않았지만 사회보장제도의 신기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급격한 재정확대를 가져왔다. 늘어난 재정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자유당 정부는 1909년 4월에 혁명적이라 할 만한 대규모 예산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인민예산(People's Budget)'이라 불린 이 예산안은 귀족들에 대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산안의 특징은 유산자에 대한 과세 증가였다. 상속세가 늘어났고, 1907년에 도입된 소득세의 누진율이 올랐으며, 연 2000파운드 이상의 수입에 대한 부가소득세(supertax)와 토지세가 신설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토지세 도입이었다. 토지 매매 시 토지 가격 인상분의 20퍼센트를 세금으로 걷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세의 도입은 대지주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는데, 대지주들이 많은 보수당과 상원에서 특히 반대가 높았다.
보수당과 부유층에서는 이 정책을 개인 재산에 대한 심각한 침해와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예산이 아니라 혁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개혁 정책을 앞장서 추진한 처칠은 '계급의 배신자'로 지탄받았다. 가까스로 하원을 통과한 예산안은 상원에서 걸렸다. 상원 귀족들은 이 예산안을 '부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350대 75로 부결시켰다.
자유당은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에게 심판을 맡겼다. 1910년 1월에 실시된 총선거의 이슈는 '귀족 대 평민의 대결'로 치달았다.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자유당은 보수당보다 겨우 2석 많은 27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신자유주의가 공업 노동자들의 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도시 교외의 중간계급으로 하여금 자유당에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계급 투표의 출발
이제까지 중간계급을 자유당에 잡아둔 끈은 '비국교'라는 공통분모였다. 그런데 이제 투표의 시금석이 종교가 아닌 계급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06년 선거는 '비국교도=자유당', '국교도=보수당'으로 종교가 좌우했지만, 1910년 선거는 계급이 주된 동력이었다.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노동자들과 함께 자유당을 지지했던 중간계급이 이번엔 보수당을 지지한 것이다. 계급 구분에 따른 유권자의 양분화는 그 후 전개된 20세기 정치 풍토의 현저한 특징이 되었다.
1910년 선거에서 중간계급이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린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현명하게 계급 이익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고, 하층민과의 연대를 저버린 배신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지역감정이 '종교'처럼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 사회 입장에서는, '계급'이 주된 동력이었던 100년 전 영국 정치가 부럽기만 하다.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지역감정의 볼모로 잡혀 상대적 부자 정당을 선택하는 모순된 투표 행태는 정치적 후진성의 피할 수 없는 증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