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16일 광주 염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 당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2년 전국을 뜨겁게 달군 축제는 월드컵뿐만이 아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국민참여경선'이 단연 화제였다. 새천년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이 처음 도입한 국민참여경선은 정당의 주요 행사인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 국민을 참여시킨 제도다.
그동안 정당 보스들이 장악해온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취지에서 미국의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방식을 빌려왔다. 일반 국민의 관심을 유도해 후보 인지도를 높여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계산도 깔렸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한국 정당 사상 최초로 지역별·성별·연령별 기준의 국민선거인단을 구성하고 만 20세 이상 모든 유권자에게 참가 자격을 부여했다. 다만 국민선거인단으로 선출되면 민주당에 가입해 당비를 납부해야 했다. 일반 국민의 참여 비율도 미국처럼 100%가 아닌 50%로 제한됐다. '제한적 오픈프라이머리'인 셈이다.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시작한 국민참여경선은 예상치 못한 '바람'을 불러왔다. 2002년 3월 9일 제주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순차적으로 실시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당내의 '이인제 대세론'을 깨고 노무현이라는 스타를 만들어냈다. 새천년민주당의 선수로 최종 선출된 노무현 후보는 이후 '이회창 대세론'까지 무너뜨리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반신반의로 도입된 제도가 민주당의 재집권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야는 본격적으로 공직후보자 추천 과정에 국민 참여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앞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당시 ▲ '돈 선거' 논란 ▲ 조직동원 ▲ 정책대결 실종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선거 승리'라는 경험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다는 판단이었다.
'조직동원' 문제 수면 위로... 말만 '국민 공천'?
2004년 총선 때는 이른바 '상향식 공천'이 화두로 떠올랐다. 1인 보스의 밀실공천을 완전 타파하고 국민이 직접 정당의 대통령·국회의원 후보 등을 뽑을 수 있도록 정치를 개혁한다는 명분이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조직동원 문제가 수면 위로 불거지자 회의론이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국민참여경선을 통한 공천을 적극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은 외부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유력 정치신인들이 토착 후보들에 밀려 줄줄이 낙천하자 당황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뒤늦게 경선이 아닌 영입·심사 등의 기존 후보 선출 방식으로 우회했다.
2006년 지방선거 역시 선거인단 투표와 여론조사 방식의 국민참여경선이 실시됐지만 참여율 저조라는 한계를 드러냈고, 사실상 국민이 후보 선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민참여경선에 대한 우려는 2007년 대선이 다가오자 또 다시 가라앉았다. 열린우리당은 한 발 더 나아가 미국형 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원의 참여 비율을 독립적으로 보장한 기존 방식과 달리, 오픈프라이머리는 당원과 국민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당원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의 기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당시의 범여권은 오픈프라이머리를 계속 추진했다. 이길 후보를 뽑아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의 '노무현 바람'을 재연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원 10만 명 보다 국민 100만 명이 뽑은 후보가 더 경쟁력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범여권의 이 같은 전략에 '빨간 불이' 켜졌다. 영입을 시도했던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출마 포기를 선언하면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흥행 카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열린우리당 탈당파 등으로 구성된 대통합민주신당 역시 오픈프라이머리를 표방한 대선후보 경선을 시행했지만, 각 후보 캠프가 선거인단을 조직적으로 긁어모으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무늬만 오픈프라이머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민 없는 국민경선'이라는 오명을 쓴 이들의 오픈프라이머리 시도는 결국 흥행 실패와 대선 참패로 막을 내렸다.
'노무현 바람'은 없고 '내부 갈등'만 남다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국민 누구나 참여 가능한 오픈프라이머리 방식이 잠시 주춤했다. 주로 하향식 공천이 이뤄지거나, 제한적 국민참여경선으로 회귀했다.
미국형 오픈프라이머리가 다시 떠오른 시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다. 박영선 민주당 후보와 시민사회 출신인 박원순 무소속 후보가 단일화하는 과정에서도 국민참여경선이 도입됐다. 국민여론조사 30%, TV토론 배심원 평가 30%, 국민참여경선 40%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됐고, 박 후보는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으로 당선됐다. 야권 전체로 보면 국민참여경선이 승리를 안겨준 것이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은 최초로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를 내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