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영광
- 10.4선언 8주년을 앞두고 있잖아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으로서 느낌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2007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평양에 갔어요. 물론 북핵 문제도 있었지만,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컸어요. 그리고 그전에도 북한을 가긴 했지만 학자로서 평양을 방문하고 정상회담을 수행한다는 것에 감회가 남달랐어요."
- 언제 처음 북한을 방문했나요?"2001년 8월 민족축전 때 많은 시민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어요. 첫 방문은 8월이라 더웠는데, 민족축전이라 감정이 들떠 있는 상태였어요. 당시 8일 정도 북한에 체류하며 행사도 같이 하고 여기저기 둘러 보기도 해서 저 개인에겐 의미가 컸어요. 그러나 6년이 지난 2007년엔 정상회담 수행원이었기에 마음 자세가 달랐죠. 제가 단순히 방문하러 간 게 아니라 정상회담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러 갔으니까요. 그리고 정상회담 성공을 위해 제 역할을 찾으며 긴장했던 것 같아요."
- 2차 남북 정상회담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제가 당시 대통령 직속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이었어요. 동북아시대위원회의 주된 기능이 동북아의 대외전략을 짜고 그 안에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대통령께 드릴 보고서를 쓰고 정책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정상회담에도 가게 된 거죠. 처음엔 제가 위원장이어서 공식 수행원으로 참석했어요. 그런데 공식 수행원에 경제부처 장관들을 많이 넣다 보니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전 공식 업무도 있지만, 학자면서 전문가라서 특별 수행원으로 조정되었죠. 정상회담 합의문 영문화 작업도 했어요."
- 회담을 지켜보셨을 것 같은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제가 회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 대통령께서 회담 후에 저희를 만나서 설명을 했습니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고 할 수 없어요. 첫날 오후에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회담할 땐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것으로 설명했고, 다음 날 오전에 김정일 위원장하고 회담했는데 그때도 썩 화기애애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노 대통령께서 공식 수행원들에게 '자칫 잘못하면 짐 싸서 내려갈 수 있으니 짐 풀지 마라'고 할 정도였어요."
- 왜 그랬나요?"당시 제가 전해 들은 바로는 북측이 여러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개성공단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해요. 북한은 개성공단에 한국 대기업이 투자해서 큰 공단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온 건 중소기업이었고 제품도 의류, 신발이나 그릇 등이어서 자기들 기대와 다르다는 것이었죠. 거기에 남한이 세계를 다니며 개성공단을 선전해서 팔아먹고 다닌다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었어요. 즉 개성공단에 대한 인식차가 있었다고 해요."
- 그럼 어떻게 (분위기를) 풀었나요? "노 대통령께서 둘째 날 김 위원장과 회담을 했어요. 점심을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었는데 그때 노 대통령이 저희에게 연설을 했어요.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내용이 '역지사지'예요. 상대방의 입장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고, 대화를 할 때는 '역지사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무척 강조하셨어요. 그게 북한에 잘 전달되어서 마음을 움직인 것 아닌가 생각해요. 그날 오후에는 회담이 잘 됐어요."
- 직접 본 김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10.4선언에 서명하고 오찬을 같이 했어요. 제가 보기에 김 위원장은 남한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성격이 화끈하고 상당히 활달해 보였어요. 왜 남한의 현실을 잘 안다고 하느냐면, 당시 베이징 올림픽이 2008년에 열릴 예정이었잖아요. 베이징 올림픽 관련해서 (남북) 단일팀, 그리고 각 응원단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같은 기차를 타고 가는 방안을 논의했어요. 그건 스포츠 교류죠.
그때 김 위원장이 단일팀은 한국의 현실 여건상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남한 선수들은 올림픽에 한번 참가해서 메달 따는 것이 어릴 적부터 목표일 텐데, 단일팀으로 북한 선수를 (한국 선수 대신 경기에) 못 보내지 않느냐는 거예요. 한국사회의 교육열을 잘 아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 8년이 지난 현재 10.4선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8년이 지났고 그 선언에 여러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이행된 것은 없지만 그래도 10.4선언은 우리가 가끔 꺼내봐야 할 고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남북 간의 평화나 통일을 얘기하지만, 통일은 먼 것 같고 평화도 위태롭죠. 이런 상황에서 10.4선언을 한 번씩 꺼내보고 그 정신을 다시 되새기는 차원에서 현재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2차 남북정상회담이 참여정부 막바지에 이뤄져서 열매를 맺지 못했잖아요. 더 일찍 했더라면 남북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그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왜 (정상회담을) 늦게 했냐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북핵 문제가 있었어요. 정치적인 환경이 성숙해지고 북핵 문제에서 진도가 나가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어서 늦어졌죠.
정상회담이 2005년 가을 정도에 열릴 수도 있었어요. 그 해 9월에 '9·19공동성명'이 나왔잖아요. 공동성명 채택 당시 한국 언론의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죠. 그때 9·19공동성명이 잘 이행됐다면 가을에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공동성명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국 재무성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있는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사태가 발생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북미 간에 대립하고 서로 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9·19공동성명이나 6자회담이 진전을 보지 못한 거죠.
그래서 공동성명은 채택됐지만, 비핵화 진전이 안 되어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2006년 핵실험 하고 난 뒤 12월 북미가 접촉하고 합의를 해 2007년 2월에야 '2·13 이행 합의'라는 걸 만들어요. 그래서 2007년 10월에 (남북 정상회담을) 했죠."
"개성공단은 남북 관계의 리트머스 시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