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해쯤 지난 뒤에도, 이 땅에 동시가 있다면...

[시골에서 동시읽기] 정완영 시인의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등록 2015.10.07 17:19수정 2015.10.0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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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사는 이웃은 '시골에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줄면서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는가'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인구 감소'를 말할는지 몰라도, 도시에서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다닐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학교'가 해마다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앞으로 열 해쯤 지나면 면 소재지 초등학교는 거의 다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면 읍내 초등학교조차 아이 숫자가 부쩍 줄면서 아슬아슬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옛날하고 달라서 '시골 놀이'를 누리거나 즐기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 시골은 어디에서나 농약을 엄청나게 뿌릴 뿐 아니라, 기계와 자동차도 흔하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고샅 놀이'도 '도랑놀이'도 없습니다. 아이들끼리 짝을 지어 골짜기를 타거나 바다로 놀러 다니는 일도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에서도 도시하고 똑같이 스마트폰으로 놀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게임을 할 뿐입니다.

아흔 살 할아버지의 동시조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정완영 글 /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펴냄 / 2011.04. / 8500원)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정완영 글 /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펴냄 / 2011.04. / 8500원)문학동네
"다섯 살 우리 아기 앞니 빠져 내리듯이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쏙쏙 빠져 내립니다
사비약 사비약 하며 사비약눈 내립니다."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중에서

"별들은 등불을 끄고 하늘 속에 꼭꼭 숨고
눈은 등불을 켜 들고 밤새도록 내리는데
우리는 한 이불 속에서 호끈호끈 잠이 듭니다."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눈 내리는 밤' 중에서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쓴 동시조를 그러모은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을 읽습니다.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동시조'라기보다는 '어른이 읽을 시조'를 쓰는 분이었고, 이 동시조집에도 '어른이 읽을 시조'가 많이 나옵니다.


"차창에 어둠을 싣고 시골 버스가 달려갑니다
호박꽃 초롱만 한 등불 싣고 달려갑니다
또 하나 그리운 등불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시골 버스' 중에서

"새벽부터 매미가 운다 자지러지게 운다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 엄마 품을 뒤흔들듯
축 처진 나뭇가지들 들어 올리며 운다."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매미' 중에서


'시골 버스' 같은 시조는 아련하도록 고운 노래라고 느낍니다. 다만, 어린이한테 걸맞을 만한 노래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 어른이 되어요. 이런 도시 아이들한테 '시골 버스'는 '고향'을 그리는 이야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시조 작품으로는 고운 노래일 수 있어도 동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매미'도 그렇지요.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 엄마 품" 같은 말마디는 어린이가 읊지 않습니다. '아기'나 '아기 엄마' 같은 말마디를 넣는다고 해서 동시조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고, 어린이 꿈을 노래할 때 비로소 동시요 동시조라고 느낍니다.

"수문 닫아 걸었는가, 수문 열고 서 있는가
밀물처럼 오던 아이들 썰물처럼 다 나가고
햇살이 혼자서 찾아와 유리창을 닦고 있다."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폐교에 서서' 중에서

'폐교에 서서' 같은 동시조도 오직 어른 눈길로 써서 오직 어른이 누릴 만한 시조일 뿐,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동시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골 아이라면 '폐교'를 알 수 있을는지 모르나, 학교 버스를 타고 마을과 학교 사이만 오가는 요즈음 시골에서도 폐교를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도시 아이한테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폐교 이야기를 동시조로 그리려 한다면, 아흔 살 웃도는 할아버지가 먼 옛날에 학교 다니던 이야기를 그릴 때 한결 구수하면서 구성진 노래가 될 만하리라 느낍니다. 정완영님 스스로 어떤 놀이를 했는지, 동시조 할아버지 스스로 어떤 웃음꽃을 피우면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아스라한 옛날에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를 지냈는가 같은 이야기를 그릴 때 비로소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동시조가 되리라 느낍니다.

"한평생 흙만 주물며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땅을 깔고 눕고, 하늘을 덮고 누워야
이승도 저승도 모르고 더렁더렁 코를 곤단다."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할아버지의 잠' 중에서

이 할아버지의 추억, 요즘 아이들한테는 아리송할까?

 전남 고흥에 있는 어느 폐교에서. 깨진 창문 바깥으로 낡은 우물터가 보인다. 시골은 아이들이 부쩍 줄면서 마을마다 학교가 하나둘 무척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진다.
전남 고흥에 있는 어느 폐교에서. 깨진 창문 바깥으로 낡은 우물터가 보인다. 시골은 아이들이 부쩍 줄면서 마을마다 학교가 하나둘 무척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진다.최종규

'할아버지의 잠' 같은 동시조도 아이들한테는 어렵거나 아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서 죽을 때까지 늘 흙만 주무르던 할아버지 삶을 고이 그린 동시조이기 때문에, 이 같은 동시조는 아이들한테 '아흔 넘은 할아버지'가 어떤 꿈을 가슴에 품으며 살았는가 하는 대목을 엿보도록 이끌 만하리라 느낍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기에, '할아버지의 잠'은 어여쁜 동시조라고 봅니다.

"우리 마을 앞 냇물을 건너가는 징검다리
돌팍 밑에 숨어 사는 버들붕어 두 마리는
돌팍이 저이들 집이래 여울목이 놀이터래."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버들붕어 두 마리는' 중에서

요새는 시골에서도 버들붕어를 찾기 어렵습니다. 도랑도 냇물도 온통 농약 냄새라서 물고기가 살기 어렵습니다. 도랑에서 가재를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입니다. 요새는 시골 아이도 개똥벌레 구경을 거의 못 합니다. 그러나 동시조 할아버지가 버들붕어 이야기를 노래한다면, 도시 아이도 시골 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할 테지요. '징검다리'는 뭔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테지요. '돌팍'은 또 뭔 소리인가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울 테지요. '여물목'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어른들한테 여쭙겠지요.

"참새는 참새끼리 오고 가는 길이 있다
잠 깊은 봄 하늘에 여울지는 길을 내며
아랫말 윗말 오가듯 오고 가는 길이 있다."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참새 길' 중에서

스무해쯤 뒤에도 이 땅에 동시가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스무 해쯤 지난 이 나라 시골 자락에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읍내에 한 곳쯤 가까스로 남을 만한 모습이 된다면, 또는 읍내에조차 학교가 모조리 문을 닫는다면, 그야말로 이 나라 거의 모든 아이가 좁은 도시에 몰려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때에도 동시가 있을 만한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동시를 써서 아이들한테 읽힐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삶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노래를 불러서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을까요?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은 '사비약눈'을 노래하지만, 도시에 사는 어른들은 눈이 오면 길이 막히고 자동차가 못 다닌다면서 투덜댑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 목소리'를 으레 듣습니다. 눈이 오는 날 '눈이 오니 너희는 즐겁겠네. 우리도 함께 눈 놀이를 할까?' 하면서 빙그레 웃는 목소리를 낼 만한 어른은 앞으로 스무해쯤 뒤에 몇이나 남을까 궁금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모든 수업을 덮고는 모든 아이가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함께 눈사람을 굴리자고 외칠 만한 교사나 교장 선생님이 앞으로 몇이나 있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정완영 글 /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펴냄 / 2011.04. / 8500원)

이 글은 최종규 시민기자의 누리사랑방(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정완영 지음, 김세현 그림,
문학동네, 2011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삶노래 #정완영 #동시조 #어린이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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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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