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에 있는 어느 폐교에서. 깨진 창문 바깥으로 낡은 우물터가 보인다. 시골은 아이들이 부쩍 줄면서 마을마다 학교가 하나둘 무척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진다.
최종규
'할아버지의 잠' 같은 동시조도 아이들한테는 어렵거나 아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서 죽을 때까지 늘 흙만 주무르던 할아버지 삶을 고이 그린 동시조이기 때문에, 이 같은 동시조는 아이들한테 '아흔 넘은 할아버지'가 어떤 꿈을 가슴에 품으며 살았는가 하는 대목을 엿보도록 이끌 만하리라 느낍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기에, '할아버지의 잠'은 어여쁜 동시조라고 봅니다.
"우리 마을 앞 냇물을 건너가는 징검다리돌팍 밑에 숨어 사는 버들붕어 두 마리는돌팍이 저이들 집이래 여울목이 놀이터래."-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버들붕어 두 마리는' 중에서요새는 시골에서도 버들붕어를 찾기 어렵습니다. 도랑도 냇물도 온통 농약 냄새라서 물고기가 살기 어렵습니다. 도랑에서 가재를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입니다. 요새는 시골 아이도 개똥벌레 구경을 거의 못 합니다. 그러나 동시조 할아버지가 버들붕어 이야기를 노래한다면, 도시 아이도 시골 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할 테지요. '징검다리'는 뭔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테지요. '돌팍'은 또 뭔 소리인가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울 테지요. '여물목'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어른들한테 여쭙겠지요.
"참새는 참새끼리 오고 가는 길이 있다잠 깊은 봄 하늘에 여울지는 길을 내며아랫말 윗말 오가듯 오고 가는 길이 있다."-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의 '참새 길' 중에서스무해쯤 뒤에도 이 땅에 동시가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스무 해쯤 지난 이 나라 시골 자락에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읍내에 한 곳쯤 가까스로 남을 만한 모습이 된다면, 또는 읍내에조차 학교가 모조리 문을 닫는다면, 그야말로 이 나라 거의 모든 아이가 좁은 도시에 몰려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때에도 동시가 있을 만한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동시를 써서 아이들한테 읽힐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삶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노래를 불러서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을까요?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은 '사비약눈'을 노래하지만, 도시에 사는 어른들은 눈이 오면 길이 막히고 자동차가 못 다닌다면서 투덜댑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 목소리'를 으레 듣습니다. 눈이 오는 날 '눈이 오니 너희는 즐겁겠네. 우리도 함께 눈 놀이를 할까?' 하면서 빙그레 웃는 목소리를 낼 만한 어른은 앞으로 스무해쯤 뒤에 몇이나 남을까 궁금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모든 수업을 덮고는 모든 아이가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함께 눈사람을 굴리자고 외칠 만한 교사나 교장 선생님이 앞으로 몇이나 있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정완영 지음, 김세현 그림,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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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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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해쯤 지난 뒤에도, 이 땅에 동시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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