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경포 해변을 따라 숙박업소와 횟집들이 옆으로 나란히 하는 틈 사이 작은 골목을 지나자 좀 전까지 함께했던 바다를 잊게하는 하늘을 담은 경포대 호수가 나온다.
김종신
한적하니 호숫가 숲을 거닐자 허난설헌 유적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작은 다리를 지났는데 다리 이름이 '교산교'다. '교산'은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이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모양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허균은 자신의 고향 야산 이름을 따 호로 삼았다. 교산이라는 이름처럼 허균은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교산교를 지나 개울 하나를 더 건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는 '난설헌교'다. 허균의 누이이자, 조선 시대 여성 문인으로 이름 높은 허초희의 호를 딴 다리다. 난설헌교에는 거북이 등에 올라탄 홍길동이 조각이 먼저 반긴다. 푸른 소나무 숲이 주는 평안함이 좋다. 500년 솔숲이다.
숲 속 아담한 고택은 허난설헌과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각사각. 발걸음 옮길 때마다 흙이 토하는 싱그러운 소리가 귀를 맑게 해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소나무는 한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한없이 싱그러운 솔향이 가득하다.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기 그만이다.
솔숲 가운데 햇살 드는 자리에는 허난설헌·균 남매의 생가가 있다.
"옛집은 대낮에도 인적 그치고/ 부엉이 혼자 뽕나무에서 울어라섬돌 위엔 이끼만 끼어 푸르고/ 참새만 빈다락으로 깃들고 있네그 옛날 말과 수레 어디로 가고/ 지금은 여우 토끼굴처럼 폐허되었네이제야 선각자 말씀 알겠구려/ 부귀는 내가 구할 바 아니라는 것"-허난설헌의 시 <감우> 중에서당대에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과 허봉을 오빠로 두고 허균을 남동생으로 둔 허난설헌은 그 역시 뛰어난 문인이었다. 여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의 흐름 속에도 아버지 허엽이 딸에게 남자와 똑같이 교육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8살 때 신동이라 불리며 중국에서 천재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난설헌도 결혼 생활은 평온하지 못했다.
시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은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 김성립 역시 자신보다 글재주가 뛰어난 아내를 부담스러워 했는지 모른다. 난설헌은 스물 일곱에 용으로 승천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시〈곡자>에서 자기 죽음을 예언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에서 차갑기만 해라."난설헌은 돌림병으로 두 아이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으로 잃었다. 거기에 점점 몰락하는 친정을 바라보며 죽음을 앞둔 그의 마음은 이미 까맣게 태워져 있었으리라.
솔숲에서 만난 '혁명을 꿈꾼 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