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조건없이 짜이를 내준 가족. 학교 가기에 앞서 어린 아들이 뿔 피리를 불었다.
송성영
공동 우물에서 한 사내가 어께에 물둥이를 이고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나마스테' 인사를 하자 빙그레 웃으며 짜이 한 잔 하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서슴없이 좋다고 답했다. 앞장 서서 걷는 그를 따라 대 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길로 갔다.
인상이 후덕한 그의 어머니와 두 아들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짜이 한 잔을 내 왔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사내에게 물었더니 본체와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가리킨다. 얼마 전 딸을 낳고 산후 조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사내의 어머니가 내어온 짜이를 마시고 있는데 등교를 서두르던 작은 아들이 방문 앞에서 뿔피리를 뿌우 뿌우 불어댔다.
"당신 아들이 뿔피리를 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크리슈나 신을 위한 것입니다."크리슈나는 브라만, 시바와 함께 힌두교의 3대 신으로 꼽는 비슈누의 화신이다. 비슈누는 커다란 금시조 가루다를 타고 다니며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바로 잡는 평화의 신이다. 힌두교에서는 10명의 비슈누의 아바타(화신이라는 뜻으로 신이 이 세상을 구제하고자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다고 여긴다)가 있다. 그 중에 아홉 번째가 석가모니 붓다며 크리슈나는 여덟 번째 화신이라 여기고 있다.
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인 크리슈나는 어린 아기, 소년, 젊은 연인, 무사, 왕, 현자 등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피리 부는 어린 소년의 그림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는데 그 그림이 바로 사랑의 화신, 크리슈나의 모습인 것이다.
장황한 힌두어와 짧은 영어가 뒤섞여 있는 사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짐작하건대 어린 아들의 뿔피리 소리에는 크리슈나의 피리와 다름없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지 않나 싶었다.
매일 아침 뿔피리를 불고 있다는 녀석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등교를 서두르는 바람에 다시 불어 달라 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가족사진으로 대신했다. 사내의 집을 빠져나오면서 내내 뿔피리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들 가족은 어린 아들의 뿔피리 소리와 함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하루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마을 골목길을 빠져 나오는데 공터에서 몇 마리의 개들이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놀고 있다. 그중에 낯익은 개 한 마리가 보였다. 녀석은 한국의 토종개로 여기는 '삽살개'의 잡종을 닮아 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은 다른 개들과 달리 컹컹 짖어대며 경계의 몸짓을 보인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