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여자의 취향, 남자를 찾아냈다

[책 한잔 하고 싶은 날] 김경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등록 2015.11.02 16:22수정 2015.11.0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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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소설의 화자는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라는 랭보의 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시구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로 '보편성'을 든다. 시를 읽는 사람 대부분은 사랑에 대한 보편성을 띠는 이 시구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사랑을 쉽게 회상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시구가 책에서 든 예처럼 이런 식이었다면 어땠을까. '입생로랑 옷을 입은 여자와 함께 생제르맹 대로에 있는 카페 플로르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피가로> 지를 읽는 듯이 행복하게'라는 식으로. 이 시를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사랑을 회상하지 못할 거라고 화자는 말한다. '이질감'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읽으며 나는 시인에게 '이질감'은 정말이지 안 될 소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본질적인 것은 보편성을 띠게 마련이므로. 시인의 언어는 보편적이냐, 아니냐를 두고 그 우수성을 판단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인이 아닌 보통의 우리라면 어떨까? 다른 옷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유독 입생로랑 옷만을 입었던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한 남자를 떠올려보자. 그는 랭보의 시보다 아래의 시에 더 큰 향수를 느낄 것이다. 지나간 모든 여자가 아닌 그 여자만을 떠올릴 것이다. 그 여자의 취향에 홀딱 빠졌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며칠을 달뜬 상태로 지낼 수도 있다.

누군가의 과한 취향은 상대에게 이질감을 쉽게 불러오긴 한다. 여름, 가을만 되면 모든 사회 생활은 작파하고 야구에만 푹 빠져 지내는 남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야구의 'ㅇ' 자에도 관심이 없는 나는 오히려 그가 딱 싫을 수도 있다. 만나려고 하면 맨날 야구장에 가있고, 말만 꺼냈다 하면 '야구, 야구'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야구와 사랑에 빠진 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 둘은 속도감 있게 친해질 것이다. 다른 건 좀 맞지 않더라도 야구 이야기를 실컷 하게 해주는 상대에게 큰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 서로의 취향이 통한 것이다. 우리 개인에겐 보편성보단 취향이 더 절대적인 유혹이다.

남다른 취향, 남자를 찾아냈다

 책 표지
책 표지
패션 에디터로 15년을 지내다 지금은 가난한 화가 남편과 함께 강원도 평창에 둥지를 튼 김경의 책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는 김경이라는 한 사람의 취향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취향은 꽤 유혹적이었다.


"무엇이 우리를 타인과 다르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김경은 '그건 취향!'이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취향이란 무엇일까.

'결국 취향이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기호나 규율이 아무리 방해해도 자기만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재밌는 것,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과 함께 삶을 더 잘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중에서


하지만 그녀는 요즘의 세태를 염려한다. 혹시 사람들은 취향이 무언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취향을 일종의 상표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공동체의 일반적인 취향을 좇아 경향이나 규범, 유행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이 자기만의 취향이라는 걸 영영 잃어버리고 있는 게 아닌지 간혹 슬금슬금 걱정된다. 내 것이라고 생각한 취향이나 선호가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는 또 어떻고?'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중에서


우리에게 취향이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즐겁게 살기 위해서이다. 김경의 말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재미있어하는 것,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찾아내 그것과 함께 이 지리멸렬하고 별 것 없는 세상을 신나게 살아내기 위해서.

또, 선택을 잘 하기 위해서이다.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을 하며 산다. 이러한 선택들이 작게는 우리의 몇 시간을 지배하고, 크게는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 앞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무리 신중하더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취향이 무언지 모르는데 어떻게 잘 선택할 수 있겠는가.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취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만큼 재미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 김경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녀는 그녀의 취향에 대해 말을 했고, 취향이란 한 사람의 삶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해 내가 알게 된 것들을 몇 개 꼽아보면 이렇다.

그녀가 존 버거, 수전 손택, 패티 스미스, 조지 오웰, 구영탄을 좋아한다는 것, 패션잡지에서 15년을 일했음에도 패션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 심지어 패션지를 사서 보지도 않는다는 것, 코 수술을 했다는 것, 은둔하는 삶을 동경한다는 것 등등. 그리고 그녀가 그의 남편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에게 빠지는 일련의 과정은 서로의 취향이 스파크를 일으켜 거대한 사랑을 불러내는 과정이었다.

"난 어딘가 가난한 구석이 있는 남자가 좋았다"고 밝힌 후 그녀가 만난 그녀의 남편은 가난뱅이 화가였다. 하지만 그 남자가 가난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가 그의 누추한 집을 봤을 때의 상황을 러스킨을 통해 상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부자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무엇을 구매할지에 관한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선택 말이다."

천만 원짜리 전셋집을 찾느라 안성으로 내려왔다는 그 남자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고, 거기다 슈베르트를 들었다. 그런데 김경에게도 음악은 "중요한 영역"인 것이 서로 통했다. 김경은 "음악 듣기에 대한 취향이 나와 맞지 않으면 나는 그 사람을 은연 중에 무시하는 경향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둘 다 패티 스미스를 좋아했다. 둘은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

"지질이, 가난뱅이, 순딩이, 모지리, 푼수, 말라깽이. 난 맨날 그런 사람들만 좋아했어요. 혹시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라는 책 봤어요? 700페이지가 넘는 무지무지하게 두꺼운 책인데 한동안 유독 이 문장에 꽂혀 있었어요.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 중에서 제일 영향받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윌리엄 블레이크와 파스칼일 거예요. 위대한 천재들이었는데 참 비참할 정도로 힘들게 살았어요. 일종의 패배자죠."

"의기양양한 패배자, 그런 사람들 저도 좋아해요. 누구보다 오만하고 고상한 부류 같아요. 아무리 가난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절대로 명성이나 돈에 타협하지 않았잖아요."

"신기해요. 말이 이렇게 잘 통한다는 게. 전혀 모르고 살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이런 기분 처음인 거 같아요."

"정말요? 그럼 우리 결혼할까요? 니체가 한 말이던가요? 결혼을 선택하기 전에 이런 자문을 해봐야 한다. 너는 이 여자와 늙을 때까지 함께 이야기할 자신이 있는가? 사랑은 일시적이지만, 함께 지내는 대부분은 대화이기 때문이다."

"누가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맞는 말이에요. 그럼 결혼은 언제 할까요? 내일? 혹시 내일은 바쁜가? 그럼 모레? 하하." -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중에서

"스타일과 스타일, 취향과 취향, 세계관과 세계관, 가치와 철학이 만나는 행복하고 이상적인 결합을" 원했던 김경은 김경만큼이나 패배자를 좋아했던 이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다. 5천 원을 주고 산 외투를 버리지 못해 소매 끝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사는 남자를 사랑하며 그녀는 지금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둘의 시작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 취향이 그를 찾아냈다."

우리가 취향을 가져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김경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김경/달/2013년 04월 18일/1만3천원)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달, 2013


#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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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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