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국정화반대 청소년행동에서 청소년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강승
이 글은 국정교과서 논쟁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사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정화찬성론자인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올바른 역사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국정화반대론자인 새정치민주연합과 이와 관련된 시민단체들이 국정화 반대근거로 주장하는 '친일독재미화'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올바른 역사'가 무엇인지 논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초·중·고를 다닌 교육의 당사자였고, 현재는 교육의 당사자가 되고 싶은 예비교사인, 제 개인의 삶과 교육에 대한 입장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학생, 해야 할 일만 있는 교육의 공간: 학교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 저에게 교육은 '학교'라는 공간으로 대변되었습니다. 학교를 처음 가던 날, 그 날의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또래를 만나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학교라는 공간은 신선함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신선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땡! 하고 울리면, 40분이라는 시간을 앉아서 조용히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40분이라는 긴 시간을 참지 못하고, 딴 짓을 하거나 짝꿍과 떠들다 걸리면, 선생님에게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매를 맞을 때면, 선생님의 특별한 설명은 없었지만, '내가 잘못해서 그렇구나!'라고 넘기곤 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초등학교 시절보다 해야 할 일이 늘어났습니다. 해야 할 일이 왜 늘어났는지는 알지 못한 채, 머리를 깎고 교복도 입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초등학교 6년 생활의 관성덕분인지 중학교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전보다 길어진 학교시간이 지루했고, 가끔씩 길어진 머리를 깎지 않거나 교복을 제대로 입지 않고 등교하던 때에, 저를 때리던 교사의 매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남들처럼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벽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그 거대한 벽을 넘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 거대한 벽에 직면하기보다는 무관심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학교에 있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려 했고, 후자의 사람들은 학교가 끝나는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저는 전자의 사람이었고,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법은 공부 이외에 재미있는 것을 찾지 않는 것이다"라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명강사의 말처럼 오로지 공부에 재미를 붙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야간자율학습을 누구에게나 강제했지만,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싶었던 저에게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가끔씩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떠드는 아이들과 이런 아이들을 남기는 교사에게 조금 짜증이 나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공부... 또 공부 이렇게 반복하며, 1년을 보냈습니다. 해야 할 일인 공부에 재미를 붙인다는 것이 서서히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공부는 왜 해야 해요?"라고 물어보곤 했지요. 대부분의 교사들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사회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니? 공부는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거란다. 해야 할 일을 해야, 얻는 것도 있는 거란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아.. 해야 할 일을 해야... 얻는 것도 있구나... 음... 그래..."라고 생각하며, 다시 공부를... 계속 공부를... 했지요.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고3이 되었고, 제 앞엔 해야 할 일들로 가득했습니다. 입시에 무관심하던 이들은 길어진 학교시간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고, 입시라는 거대한 벽을 서서히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다듬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을 더... 좀 더... 늘려갔습니다. 1월이 가고, 4월이 가고, 해야 할 일은 더 늘어만 가고, 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늘어만 가고, 5월이 되었을 때, 문득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 거지?"라는 질문이 제 가슴의 모든 부분을 다 채웠습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어 주변에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 때는 다 그런 거란다. 언젠가는 다 의미가 있을 거야"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그 대답은 제 가슴을 채우지 못했고, 저는 그 순간 무너져, 자연스럽게(?) 입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수능을 망치고, 3개월이라는 무의미한 시간 동안, "그때 왜 더 인내하지 않았냐는" 반성 아닌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을 인내하여, 저는 어쩌다 보니 사범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저에게 교육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 할 일을 가득 채워주는 곳이었고, 교육은, 미래를 위해, 대학으로 가기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학교는 하고 싶은 걸 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나를 인내하는 공간이었다."교사, 해야 할 일만 있는 교육의 공간: 학교사범대입학은 교사가 되고 싶어서 라기보다는 제가 배우고 싶은 전공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를 통제하고 때리는 교사라는 존재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맞은 놈은 맞을 짓을 하니까, 맞는 거다"는 교사의 말에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제 짝꿍이 떠들었는데, 저를 지목해서 나오라고 하던 때에, 저는 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교사는 저에게 체벌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사의 처벌이 객관적이지는 않네"라고 생각하며, 불쾌함을 누그러뜨려야 했지요.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고, 교사의 말에서 느꼈던 불쾌감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은 2학년 때쯤이었습니다. '학생인권', "학생도 인간이다"는 글을 보았을 때, 가슴속에 있던 그 불쾌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 맞아야 하는 인간은 없구나! 통제되어야 하는 인간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뇌리에 꽂혔습니다. 2010년부터 시작해, 2013년까지 지속된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은 경기도, 광주광역시, 서울특별시, 전라북도 등 4개의 시·도에 학생인권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 선물은 4개 시·도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학교현장에서 체벌이 줄어들고, 두발이 자유화되었고, 진짜(?) 야간자율학습이 시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학교전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탐탁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나 봅니다. '학생인권'과 관련된 기사를 검색할 때면, 보이는 "교권이 추락하고 있다"는 문구들 사이로,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약화된 상황에 대해 "학교현장을 모른다"는 교사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보였습니다. "교권, 그게 뭐 길래? 교사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리
를 스치며, 교권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교권: 교사의 교육과 관련된 권리와 권한, ➀ 교육과정을 결정 및 편성할 수 있는 권리 ➁ 교재의 선택 및 결정할 수 있는 권리 ➂ 수업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 ➃ 학생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 교권은 교사의 권위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교권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학생인권과 관련된 기사에서 사용된 교권의 의미가 ➃ 학생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한 부분이거나 교사의 권위가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교사들이 학생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학생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으로 그리고 이를 교사의 권위로 인식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교사라는 존재가 이제는 싫기보다 불편해졌습니다.
사범대에 입학해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교육이라는 말이 눈에 많이 밟혀서인지, 저는 교사가 될지 말지에 대해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교사라는 존재에 대해 느꼈던 불편함이 하지 말라고 저를 말렸습니다. 그런 고민의 연속 속에서 시간이 흘러, 교생실습이라는 시간이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교생실습이 제가 배운 교육학과 전공의 지식을 활용해 수업을 구성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일 거라는 기대덕분인지, 막연한 설렘을 느꼈습니다.
교생실습 첫날, 현직교사들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한 교사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 손을 들고, "교육학을 공부하다보면, 다양한 교육이론과 수업모형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생님, 여태껏 어떤 교육이론이나 수업모형을 활용해서 수업을 구성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음... 교육이론... 수업모형.... 다 의미 없어요. 현장에서 교과서 내용도 많아서, 진도 나가기도 바쁜데... 실습 때 많이 활용해보세요..." 교사의 답변에, 적지 않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사는 왜 존재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4주라는 실습의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 보내고, 한 학기가 지나고, 방학을 지나, 다음 학기가 돌아왔습니다. 다시 교생실습을 가야 할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실습을 가기 전, 현직교사로 발령된 지 얼마 안 된 선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아... 학교 가면, 애들 만나고, 수업도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너무 힘들다... 애들보다 컴퓨터 보는 시간이 훨씬 많은 거 같아... 아... 나이스... 행정업무... 참... 싫다. 수업 준비할 시간도 없어..." 선배의 푸념을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쉬는 시간과 수업이 없는 시간조차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던 교사들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첫 실습에 내 질문에 답했던 교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행정업무로 인해,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준비하기 쉬운 강의식 수업과 지식전달자로서의 교사를 택한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사는 담당할 학년·과목을 개학하기 1주일 전에야 알게 된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향후 1년간의 수업과 생활지도 계획을 짤 시간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방학이라는 긴 시간을 왜 활용하지 못할까하는 궁금증이 들어, 알아본 결과, 2월에야 신규교사가 발령되고, 교원들의 학교 간 이동이 이뤄지고 나서야 학교의 교원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2월말이 되어서 담당할 학년·과목을 배정한다고 하네요. 개학하고서 한 달이 지나 3월말쯤에 학교의 1년 계획이 완성된다고 하네요.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 동안 1년 계획을 완성하느라, 수업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수업을 하게 되며, 1년 계획을 완성하고 나서도, 행정업무에 치여 본연의 업무(?)인 수업을 준비하는 데 벅차다고 합니다.
"학교는 교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정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교사에게 해야 할 일을 가득 채워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의 교육과정이 편성되는 역사를 바라보면, 교육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 원안이 거의 수정 없이 확정되는 걸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가 교육과정의 편성은 국가가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습니다. 민주화 이전까지만 해도, 교육부가 제시한 교육과정 원안은 거의 변화 없이 확정됐습니다. 최근 들어 교육부가 교육과정 원안을 제시하고, 공청회를 개최하여 의견수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육과정의 원안은 아주 미묘하게 수정되어 확정됩니다. 왜 그런 걸까요? 교사에게 법적으로 국가 교육과정을 편성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적(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6조(교섭 및 체결 권한 등))으로 교원단체(교원노조 포함)의 교섭대상으로 국가 교육과정에 대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사들이 가르쳐야 할 내용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해도, 그 불만은 허공에 떠도는 말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과 교재 선택권을 주기는 하지만 이도 실질적으로 무의미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과 관련돼서, 학교장이나 부장급 교사가 많은 영향력을 가지기에, 상대적으로 평교사의 의견은 덜 반영됩니다.
정말로 다행인 건(?)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이 교사가 속한 학교의 분위기에 따라 민주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재 선택권에 대한 얘기하게 되면,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은 그나마 양반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초등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과목이 국정교과서(현재 3~6학년의 영어·예체능만 검정)로 되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모든 교과가 검정이긴 하지만, 검정의 기준이 매우 엄격하고 세세해서 대부분의 교과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교사에게 교재 선택권은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실질적으로, 한국사회에서 교사에게 교권(➀ 교육과정을 결정 및 편성할 수 있는 권리 ➁ 교재의 선택 및 결정할 수 있는 권리 ➂ 수업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사들은 자연스럽게 "교권 없는 교육"에 살게 됩니다.
교권이 없는 교육의 상황과 교과의 양이 너무 많은 것이 맞물려, 교사들은 교과서를 재구성하기보다는 지식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많이 전달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사들은 현실적인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교권을 ➃ 학생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 또는 교사의 권위로 협소하게 인식하게 되고, 교사들의 교권에 대한 인식은 권위주의적인 교육관과 맞물려 ➃를 학생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교사에게 교육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 할 일을 가득 채워주는 곳이었고, 교육은 교사를 지식을 전달하는 로봇으로 만들었고, 학교는 교사를 시스템을 유지하는 파수꾼으로 만들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그리고 그 물음이 학생과 교사로부터!교사를 할지 말지에 대한 밀당(?)도 4년의 긴 시간을 끝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문득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의 고민과는 달리, 마침표는 너무도 쉽게 찍혔습니다. "아이들이 좋다."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당사자 없는 교육"에 살았던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지 모를 저란 사람에게 아이들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교육의 공간인 학교에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고 자신을 인내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에서 제 자신을 느꼈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위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단지 아이들이 좋다는 생각은 제 결정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한부분일 뿐입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교육은 당사자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는 대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제가 경험해본 적 없는 교육을 이루고 싶다"는 제 자신의 바람으로부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의 교육에서 학생과 교사는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공간인 학교에서 누군가는 현재를 살아가기 보다는 미래를 위해 자신을 인내하고, 다른 누군가는 지식을 전달하는 로봇이거나 시스템을 유지하는 파수꾼으로서 존재합니다. 학생과 교사는 교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도 못하고, 현재를 살아가지도 못합니다. 이는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과 교사가 주체적으로 교육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당사자 없는 교육"의 역사는 광복 이래로 계속되었습니다. 교육의 자율성은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었고, 교육은 언제나 정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 스스로가 교육을 만들어나갈 수 없는 구조인데, 교육의 자율성이 존재할리가 만무하지요.
지난 10월, 국정교과서 논쟁이 일어나고, 국정화 반대를 위해,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으며, 교사들은 시국선언을 하였습니다. 교육의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저에게 많은 반가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던져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국정화와 관련되어, 정치적 견해가 주를 이룰 뿐, 교육적 견해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매우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교육이라는 영역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정치와 상호작용하면서도 상호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치에 종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당사자들이 만들어가는 교육"을 바라기에, 저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대한민국의 교육과정 지침서에는 '교과서는 사례일 뿐이고 이를 재구성하여 가르칠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는 교사의 교권을 인정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건 "당사자 없는 교육"이라는 상황에서 헛소리나 다름없습니다. 국가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관계를 통해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우선적으로, 자유발행제에서의 교육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OECD국가들은 국정제 →검·인정제 →자유발행제로 넘어가는 추세입니다. 자유발행제는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등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자유발행제에서도, 국가 교육과정은 존재합니다. 단지 교육과정이 하나의 가이드라인이고, 그 가이드라인은 기본적인 수준과 최소한의 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교사는 자신만의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교재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수업을 합니다. 교사는 전문가이기에, 교육을 교사의 자율에 맡기게 됩니다. 이로 인해, 수업상황에서 교사는 지식전달자로서의 모습이기보다는 가치전달자로서의 모습을 띄며, 교사와 학생은 수업을 통해 가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나누게 됩니다. 자유발행제에서 국가 교육과정이 교과서에게 주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와 달리 한국의 검정제를 바라보면, 국가 교육과정은 교과서에게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이는 한국의 교육과정 편성이 전적으로 국가에 일임되어 있고, 교과서에 대해 국가가 제시한 검정의 기준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검정의 기준이 너무 세세하고 엄격한 나머지, 교과서들은 서로 비슷한 내용을 가지게 되며, 이로 인해 교사와 학생의 교재 선택권은 제한된다고 볼 수 있고, 실질적으로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검정제는 자유발행제에 비해 다양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과도한 교과 양과 교사가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한국의 교육상황과 맞물려 다양성의 차원을 악화시킵니다. 이와 같은 교육상황에서 교사는 자연스럽게 교과서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 또한 다양성의 차원을 악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는 국가가 제시한 검정의 기준에 맞추다보니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아니라 제한된 관점(주로 국가주의 사관,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하는)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정제에서 국가 교육과정은 교과서와 일치(?)되어 있다고 보면 될 겁니다. 사실 정확히는 관계를 따질 필요가 없어집니다. 역사교과서와 같이 다양한 해석이 오고가는 교과에 국정제를 사용한다는 건 자연스럽게(?) 다양성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가치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지식만이 오고 가는 한국의 교육상황에서 이런 의미는 더욱 강화되겠지요. 암기식·주입식교육도 강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검정제에서 제한되지만 있었던 교사와 학생의 교재 선택권은 국정제에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교사의 교권침해는 물론이고, 학생의 학습권 침해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국정제에서 교과서는 단일교과로 통일되고 특정한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 특정한 관점은 정치권력을 잡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이데올로기)을 반영할 위험이 높습니다. 애초에도 없었던 교육의 자율성은 그냥 없게 되겠죠.
교육소외는 당사자들이 교육이라는 상황에서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발생하는지도 모릅니다. 교육의 상황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건, 당사자들의 의견이 교육에 반영되고, 그들이 교육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느끼는 겁니다. 자유발행제·검정제·국정제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당사자성을 반영하는 교육은 자유발행제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유발행제가 이상적인 교육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데에 자유발행제를 참고할 수 있을지라도, 이 질문에 답하려면 좀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 편성과 교재 선택에 교사와 학생의 의견을 반영한다던가, 학생은 미성숙한 존재라는 고정된 편견이 바뀐다던가 등의 상상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우선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물음이 학생과 교사로부터 함께 나아갈 때, 교육의 자율성을 만들어가는 '첫 걸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11월3일 오전11시 박근혜정부는 국정교과서를 확정고시 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이 날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이 날을 친일독재미화의 역사가 기록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한번 다른 상상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 날을 현행교육이 실현해놓은 "당사자 없는 교육"을 강화하자는 선언의 날로 이해해보는 건 어떨까요? 국정교과서가 확정고시도 된 마당에 뜬금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국정교과서 반대를 넘어, "우리의 교육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하는지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 고민으로부터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을 정하고 그 행동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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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배달라이더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의 충북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배달노동을 하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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