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노태우), 평화민주당(김대중)에 이어 제3당으로 전락했다. 전체적으로는 여소야대 국회였지만 정국 주도권은 제1야당을 이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쥐게 됐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평생 민주화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사독재세력과 손잡는다.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자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는 '구국의 결단',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포장했지만 쿠데타 세력과 야합, 정치적 배신, 변절자라는 비판이 계속됐다. 특히 민주진보세력이 지역적으로 분열하면서 영남 지역패권주의 강화 등 한국 정치에 준 악영향도 만만치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은 야합이라며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간 김 전 대통령은 민자당 내에서 '노태우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과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대립했지만, 결국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민자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누르고 평생의 꿈이었던 대통령이 됐다.
[1993년 문민시대]"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중략)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문민시대를 열었다.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온 지 31년 만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군부 내 사조직이자 1979년 12.12 쿠데타를 주도하고 군 요직을 장악해온 하나회를 해체시켜 정치군인들을 축출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부정부패와 12.12 쿠데타의 책임을 물어 구속하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도 추진했다. 또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1급 이상 고위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금융실명제는 YS가 추진한 개혁의 정점이었다.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높여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다.
또 박노해·김남주 등 정치범으로 잡혀있던 문인들을 대거 석방하는 등 군사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과감한 개혁으로 한 때 지지율이 90%에 육박하기도 했다.
[1996-1997년 노동법 날치기-IMF]1996년은 김영삼 정권의 우경화가 가속화하면서 정권의 몰락이 시작된 해였다. 출발은 좋았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를 진압하면서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하더니 그해 말에는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정부·여당의 일방적인 노동법 개정안 처리로 정리해고제와 파업 때 대체인력을 쓸 수 있는 대체근로제가 도입되며서 노동계의 거대한 반발에 부딪혔다.
정권 말기는 최악이었다. 1997년 1월 한보철강에서 시작된 기업 연쇄 부도 사태는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등 나라가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자신의 임기 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돌파와 OECD 가입이라는 눈에 보이는 업적에만 매달리다가 화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또 '소통령'으로 불렸던 차남 현철씨는 무분별한 국정 개입 문제로 국회 청문회에 섰고,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국가부도 사태와 아들의 비리 연루 등 정권의 난맥상으로 김 전 대통령의 퇴임 직전 지지율은 한자릿수로 추락했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이어졌고,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도동으로 돌아갔다.
[퇴임 이후 독설가]퇴임한 후 김 전 대통령은 독설로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나타내려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해서는 독재자라고 비판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가 자신을 뒷조사했다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을 뒷조사했다면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03년 8월에는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참으로 무능하고 대책없는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차남 현철씨가 18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하자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독설을 퍼부었다.
김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독재자의 딸", "칠푼이"라는 독설을 자주해 논란이 일었다. 그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에게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화해했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병원을 방문해 정치적 응어리를 풀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도 장의위원회 고문을 맡아 영결식에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만큼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조깅을 거르지 않았고, 퇴임 후에는 산책과 배드민턴으로 건강 관리에 힘썼지만 88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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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합당·문민시대·외환위기... YS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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