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합당·문민시대·외환위기... YS의 빛과 그림자

키워드로 풀어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 88년

등록 2015.11.22 20:05수정 2015.11.2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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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김영삼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이들의 '말말말' ⓒ 강신우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40년 정치 행적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즐겨쓴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길에는 문이 없다)이라는 휘호처럼 거침없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며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해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투사였고, 민주화를 이뤄낸 후에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군사독재세력에 투항한 '변절의 정치인'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전두환·노태우 처벌 등 거침없는 개혁으로 크게 지지받았지만, 임기 말은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부도사태와 차남 현철씨 등이 연루된 측근 비리로 얼룩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을 몇 가지 키워드로 풀어봤다.

[1940년대-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에서 아버지 김홍조씨와 어머니 박부연씨 사이에서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멸치 어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은 청소년 시절부터 대통령을 꿈꿨다. 중학생 시절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고 꿈을 키워간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김 전 대통령은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을 받으면서 정치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택상이 2대 민의원 선거(총선)에 출마하자 선거운동을 도왔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비서관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25세 나이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김 전 대통령의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했고, 이후 1991년 3당 합당 때까지 30여 년을 야당 생활을 했다.

[1971년 40대 기수론]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6년 7월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 씨가 서울 서린호텔에서 조찬회동을 하는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6년 7월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 씨가 서울 서린호텔에서 조찬회동을 하는 모습.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야당 지도자였다. 그는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이끌던 중 상도동 자책 인근에서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맞서는 야당 지도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하지만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하면서 첫 번째 정치적인 좌절을 겪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그는 1974년 신민당 당수 경선에서 승리해 최연소(47세) 제1야당 총재로 부활했다. 

1979년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검거 농성 사건으로 그는 박정희 정권과 극한 대립했다. 총재직을 박탈당하고 의원직까지 제명당했다. 당시 그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록을 남겼다. 또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적 탄압은 부마항쟁을 촉발했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는 10.26 사건으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렸다. 

[1983년 단식 2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대통령의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대통령의 모습.연합뉴스

10.26 이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 하고, 1979년 12.12쿠데타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도 이어졌다. 그는 상도동 자택에서 두 차례나 장기간 연금되는 등 정치활동에 나설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이 되자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정했고 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는 등 민주화운동의 돌파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후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는 분열했다. 1987년 대선후보 선출 방식에 합의하지 못하고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진 것이다.

19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자리를 놓고 벌인 양 김씨의 갈등은 민주세력의 분열을 가져왔고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1990년 3당 합당]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노태우), 평화민주당(김대중)에 이어 제3당으로 전락했다. 전체적으로는 여소야대 국회였지만 정국 주도권은 제1야당을 이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쥐게 됐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평생 민주화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사독재세력과 손잡는다.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자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는 '구국의 결단',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포장했지만 쿠데타 세력과 야합, 정치적 배신, 변절자라는 비판이 계속됐다. 특히 민주진보세력이 지역적으로 분열하면서 영남 지역패권주의 강화 등 한국 정치에 준 악영향도 만만치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은 야합이라며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간 김 전 대통령은 민자당 내에서 '노태우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과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대립했지만, 결국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민자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누르고 평생의 꿈이었던 대통령이 됐다.

[1993년 문민시대]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중략)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문민시대를 열었다.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온 지 31년 만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군부 내 사조직이자 1979년 12.12 쿠데타를 주도하고 군 요직을 장악해온 하나회를 해체시켜 정치군인들을 축출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부정부패와 12.12 쿠데타의 책임을 물어 구속하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도 추진했다. 또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1급 이상 고위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금융실명제는 YS가 추진한 개혁의 정점이었다.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높여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다.

또 박노해·김남주 등 정치범으로 잡혀있던 문인들을 대거 석방하는 등 군사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과감한 개혁으로 한 때 지지율이 90%에 육박하기도 했다.

[1996-1997년 노동법 날치기-IMF]

1996년은 김영삼 정권의 우경화가 가속화하면서 정권의 몰락이 시작된 해였다. 출발은 좋았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를 진압하면서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하더니 그해 말에는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정부·여당의 일방적인 노동법 개정안 처리로 정리해고제와 파업 때 대체인력을 쓸 수 있는 대체근로제가 도입되며서 노동계의 거대한 반발에 부딪혔다. 

정권 말기는 최악이었다. 1997년 1월 한보철강에서 시작된 기업 연쇄 부도 사태는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등 나라가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자신의 임기 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돌파와 OECD 가입이라는 눈에 보이는 업적에만 매달리다가 화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또 '소통령'으로 불렸던 차남 현철씨는 무분별한 국정 개입 문제로 국회 청문회에 섰고,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국가부도 사태와 아들의 비리 연루 등 정권의 난맥상으로 김 전 대통령의 퇴임 직전 지지율은 한자릿수로 추락했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이어졌고,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도동으로 돌아갔다.

[퇴임 이후 독설가]

퇴임한 후 김 전 대통령은 독설로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나타내려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해서는 독재자라고 비판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가 자신을 뒷조사했다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을 뒷조사했다면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03년 8월에는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참으로 무능하고 대책없는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차남 현철씨가 18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하자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독설을 퍼부었다.

김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독재자의 딸", "칠푼이"라는 독설을 자주해 논란이 일었다. 그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에게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화해했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병원을 방문해 정치적 응어리를 풀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도 장의위원회 고문을 맡아 영결식에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만큼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조깅을 거르지 않았고, 퇴임 후에는 산책과 배드민턴으로 건강 관리에 힘썼지만 88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다.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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