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눈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권순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거실 쇼파에 올라선 아이들이 외쳤다.
"엄마 저거 눈이야?""어? 눈이네? 진짜 눈이다. 첫눈이야~"거실 창으로 본 바깥풍경은 눈 내리는 세상이었다. 아이들은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눈을 좋아한다. 마치 예전부터 누군가가 '눈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고 설레는 거야'라고 미리 알려준 것처럼 말이다. 눈이 와서 신이 난다고 폴짝폴짝 뛰는 아이들을 보는 건 덩달아 신나는 일이다. 아이들은 하늘에서 선물 보내듯 아낌없이 펄펄 내리는 눈을 보며 행복해했다.
"나가고 싶다.""안돼. 동생 콧물 엄청 많이 흘리는 거 알지?""그래도 나가고 싶다.""밖에 엄청 추워. 너까지 감기 걸리려고 그래?"끊임없이 반복되는 나가고 싶다는 큰 아이의 재촉에 잠깐 나가서 산책만 하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겨울은 정말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에선 챙겨야 할 게 더 많아져 부산스런 외출 준비를 하게끔 하는 계절이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모자에 장갑에 작년에 신다가 대충 신발장에 넣어 둔 털 부츠까지 장착시키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파트 공동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들이닥치는 매서운 칼바람에 흠칫 놀랐지만 이왕 데리고 나왔으니 조금 놀다 들어가긴 해야 했다. 하얗게 눈 내린 풍경을 보고 나니 잔뜩 기대하고 나온 애들을 다른 어떤 이유로 그냥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도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만지고 놀 수 있는 건 아이일 때, 그때 잠깐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지금의 내가 아이일 때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눈 내리는 날의 어떤 특별한 감흥에 관한 기억은 20년 넘은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거슬러 올라간다. 별 걱정 없이 놀며 공부하던 시골의 초등학생 시절, 눈만 내리면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밖을 뛰쳐나가 놀았다. 학년에 딱 한 반 밖에 없어 6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과 그렇게 눈 오는 날 추억을 쌓인 눈만큼이나 쌓았었다.
"이제 그만 교실로 들어와!"라고 창문 열고 외치던 선생님의 목소리도, 추워서 낀 장갑에 녹은 눈이 흘러내려 축축해질 때까지 눈싸움을 즐기던 친구들도 눈이 오면 가끔 생각이 난다.
그리고 대학 때, 학교 연구실에서 동기들 선배들과 새벽까지 시험공부를 하고 돌아가던 그 날에도 눈이 많이 와 있었다. 학교 전체를 가로질러 가야만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우리 말고 아무도 없던 고요한 학교에 내린 눈은 정말 천사의 선물 같았다. 어두운 밤은 가로등이 꺼져있어도 하얀 눈 덕분에 환했다. 다음 날 시험 걱정을 잠깐이나마 잊을 만큼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눈 오는 날의 아름다운 추억은 여기까지이다. 눈 오면 버스가 늦어 출근길 걱정을 했고, 눈이 녹지 않아 얼어있는 상태의 응달을 지날 때면 넘어질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운전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눈 오는 날이 특히나 걱정과 불편을 자아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비오는 날과 눈 오는 날을 제일 싫어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환희, 감정. 그런 것들이 살아가는데 아예 지장을 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사는데 치여 중요한 순위가 밀려난 것 뿐 이다.
아이들이 눈을 보고 만지고 밟으며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며 잊었던 설렘이 떠오르며 그간의 추억들에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눈이 왔기 때문에 나가서 썰매를 타야 한다고 엄마를 조르던 아이 모습의 내가 이젠 엄마가 되어 내 아이가 눈과 더 놀고 싶다고 부리는 투정을 받아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난 눈이 와서 들뜬 마음에 밖에 나왔다 해도 그날이 특별한 날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의 눈 오는 날 특별한 추억에 내가 등장할 수 있다면 앞으로 눈 오는 날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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