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할아버지인 우당을 가리키고 있다.
조호진
우당 형제는 구차한 목숨을 도모하지 않았다. 밀정의 밀고로 체포돼 일본 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우당은 1932년 11월 17일 66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우당뿐 아니라 첫째 형 건영(1853~1940), 둘째 형 석영(1855~1934), 셋째 형 철영(1863~1925), 여섯째 동생 호영(?~1933)도 망명지에서 눈을 감았다. 유일하게 환국한 형제는 우당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1869~1953)뿐이다.
항일투쟁에 목숨 바친 이는 다섯 형제뿐이 아니다. 첫째 이건영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고,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귀국한 뒤 공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됐다. 둘째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는 등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우당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밀정 암살에 가담했고, 셋째 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우당 가문은 목숨만 바친 게 아니다. 가산 전부를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급히 처분한 탓에 600억 원 밖에 못 받았지만 제값을 받았다면 2조 원가량의 재산이었다고 한다. 우당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8년간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이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축이었다. 우당은 60세를 넘긴 노령에도 비밀결사대에게 일본군 수송선과 천진 주재 영사관 폭파 등을 폭파하도록 지휘한 아나키스트였다.
"항일투쟁은 당연한 의무, 조국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