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청년 이봉창의 고백> 책표지.
휴머니스트
김구가 의열 투쟁을 목적으로 조직한 '한인 애국단' 1호 단원인 항일운동가 이봉창(1900년~1932년10월 10일)의 삶을 다룬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배경식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한 부분이다. 부제는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는 어떻게 한인애국단 제1호가 되었는가'이다.
현재 포털사이트에서 이봉창을 검색하면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거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자 취직을 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았다'와 같은 부분들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그의 집안을 철도 부설이나 병참기지 건설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에게 가진 땅을 빼앗긴 억울한 입장으로 설명한 경우도 보인다.
이런 설명들은 대일본 제국의 모던보이였던 이봉창을 막연히 미화하기에 충분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거나, 일본(인)에게 반감을 가지며 오랜 세월 항일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처럼, 그래서 그런 그가 애초부터 거사만을 위해 상하이로 김구를 찾아가 의기투합, 이봉창 의거를 했던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3.1운동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이봉창의 행적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도쿄 의거를 주도하고 이봉창을 일본에 파견한 김구다. 김구는 <동경작안의 진상>과 <도왜실기>, <백범일지>에 이봉창의 행적에 대해 상세히 적어 놓았다. 이들 기록에 묘사된 이봉창은 자신을 희생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은 이봉창의 재판기록을 읽다보면 크게 흔들린다. 이봉창이 감옥에서 예심판사에게 제출하기 위해 쓴 <상신서>, 아홉 차례에 걸쳐 작성된 <신문조서>, <청취서>, <검증조서>, 담당 검사의 <의견서> 등 재판 관련 기록에는 이봉창의 인간적인 면모, 김구와 함께 천황을 폭살하고자 모의하는 과정, 그리고 일본으로 가서 20여 일 동안 겪은 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에는 '독립운동 영웅 이봉창'의 고정된 이미지를 수정할 만한 그의 내면세계와 삶의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에서.<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에 의하면 이봉창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이봉창의 집안은 용산 일대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고 한다. 애초 인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용산에 일본인들이 정착하면서 건설 붐이 일었고, 이미 건축청부업과 우차 운반업에 종사하며 큰돈을 번 신흥 자본가였던 이봉창의 아버지가 용산으로 이주해 우차 운반업과 목재상으로 다시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린 이봉창이 지나가면 사람들 대부분 "저 애가 이진구의 둘째아들이야!"라고 수근대며 부자임을 부러워하곤 했단다. 이봉창의 아버지는 신흥자본가의 여유와 호기로 따로 살림 차린 첩만 둘이나 될 정도로, 그로 매독(성병)을 얻어 사업에 지장을 받을 만큼 여자관계가 문란했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이진구의 아들인 이봉창 역시 육체적인 쾌락을 우선하고, 신문물을 즐기는 모던보이로 자랐다고 한다. 3.1운동 당시 이봉창은 한강통(지금의 한강로) 무라타 약국에서 일했는데, "3.1운동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일본 재판정에서 답할 정도로 일본의 식민정책에 반감을 느끼지 않은 '신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이 많은 기록 가운데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체포 당시 이봉창이 소지한 압수 증거품 목록에 있던 사진들이다. 모두 여덟 장의 사진들 중 여섯 장이 여자 사진이다. '사진 속 여자는 누구일까? 가족? 애인? 총각이니까 애인 한 명쯤 있었겠지….' 사진의 주인공은 의외였다. 친구에게 받은 여자 사진을 제외하면 모두 유곽에서 만난 직업여성 사진이다. 세 장은 상하이에서 상대한 여성 사진이고, 나머지 한 장은 상하이를 떠나 도쿄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오사카의 한 유곽에서 만난….이봉창은 탁구, 야구 등 운동을 좋아하고 사람 사귀기를 즐기는 쾌활하고 낙천적인 청년이었다. 이봉창의 <신문조서>에도 영화와 음악을 즐기고, 술과 마작 때문에 빚에 쪼들리고, 카페와 유곽을 무시로 드나드는 등 근대 소비문화를 향유한 모던 보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에서.독립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이봉창에게 무슨 일이?조선 민중 최대 궐기인 3.1운동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런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는 항일 투쟁가 이봉창. 일본인들의 차별이 싫어 이왕이면 일본인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혜택을 맘껏 누리며 살고 싶었던, 그리하여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가슴 아파하고 고민했던 날보다 조선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차별받는 억울함에 더 괴로워했다는 청년 이봉창.
술 때문에 빚에 쪼들리면서도 카페와 유곽을 드나들면서 향락을 즐겼다는 청년 이봉창, 몇 개의 일본이름을 번갈아 쓰며 몇 번이나 수금한 돈을 들고 도망가기도 했다는 이봉창.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당장 갈 곳이 없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동포들에게 임시거처나 일자리를 주선해주는 교민단체 정도로 알고 찾아갔다는 이봉창.
이처럼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모던 보이 이봉창. 그런 그가 어쩌다가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져 사살할 생각까지 했을까? 대체 이봉창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