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계획이 뭐니?"... 아차, 괜히 물었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57] 학생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유

등록 2016.01.02 12:35수정 2016.01.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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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2015년의 마지막 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고3 아이들이야 지난달 수능을 치렀을 때 일찌감치 끝났지만, 후배들에겐 이때가 비로소 한 학년이 마무리되는 날이다. 고1들은 이 방학만 지나면 풋풋한 새내기 후배들을 맞이할 테고, 고2들은 본격적으로 대학입시를 위한 '수능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수업시간 아이들과 지난 한 해를 되짚었다.

우선, 아이들에게 방학 계획을 물었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서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때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삐딱한 말투로 답변했다.

"선생님들이 자상하게 다 알아서 시간표를 짜주시는데, 저희가 굳이 따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체념인지 조롱인지 헛갈렸다.

언제부턴가 고등학생들에게 방학은 그 의미를 상실한 '사어(死語)'가 됐다. 굳이 학기 중과 다른 게 있다면,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이 없다는 것 정도다. 일과 중 보충과 심화라는 이름으로 수업이 그대로 이어지고, 과제도 학기 중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방학이 언제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예외 없이 '진짜' 방학을 묻는 건지, 아니면 학사력에 기록된 방학을 묻는 건지 반문한다.

한 아이는 '방학이 학기 중과 전혀 다를 바 없다'며, 주머니에 넣어 꼬깃꼬깃해진 방학 일정표를 보여주었다. 사흘 동안의 신정 연휴가 끝나면, 바로 '방학 보충수업'이 시작된다. 주말과 2월의 설 연휴를 제외하면, '진짜' 방학은 채 일주일도 안 되는 것 같다. 방학 선언은 요식 행위일 뿐이라는 그에게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방학 계획을 괜히 물었다.

 방학 하자마자 보충수업... 고등학생은 괴롭다.
방학 하자마자 보충수업... 고등학생은 괴롭다.sxc

'즐거웠던 일' 말해보라고 했더니, 하나도 "없다"는 학생들


잠시 내 고등학교 재학 시절이 떠올랐다. 고2 때 방학식 날 담임선생님과 함께 지난 한 해 고생했다며 교실에서 조촐한 파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대학입시를 향한 출정식 같은 비장한 분위기가 없진 않았지만, 서로 '지난 1년간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며 토닥이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땐 '책거리'의 전통이 남아있었던 터라 그나마 따뜻한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서둘러 말을 끊고, 지난 한 해 동안 기억나는 일이나 즐거웠던 일을 서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했다. 학생들은 다들,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없어요"란다. 수업 내용은 아니더라도 학교 축제나 동아리 활동, 하다못해 체육대회 때 에피소드 정도는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무색해졌다.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바꾸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꼴이 됐다.


사실 그건 거짓말일 거다. 어떤 행사가 겹쳐 일주일에 한 번뿐인 동아리 활동이 취소될라 치면 교무실에 달려와 거세게 항의하고, 학교 축제 때 무대에 한 번 서는 꿈으로 학교에 다닌다는 아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결석을 밥 먹듯 하다가도 체육대회 때에 맞춰 그날만 골라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니 기억나는 일, 즐거웠던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물론 한편으론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그런 행사들은 학교생활에서 하나같이 '예외적'일 뿐이다. 학교 축제나 체육대회의 경우는 1년에 한 번뿐인 데다, 무대에 오르거나 대표로 참여하는 아이들은 늘 소수다. 좋아서 모인 동아리 활동조차도 대개 수업과 과제에 치여 잠시 숨통을 틔우는 휴식 시간으로 여겨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대다수 고등학생들에겐 '공부가 전부'라는 생각 때문이다. 공부를 곧잘 해서 안팎의 주목을 받는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이에게는 떠올릴 만한 추억이 별로 없다. 그들은 학교 시스템이 공부 잘하는 몇몇 아이들에게 최적화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들러리'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그들의 "없어요"라는 짧은 외마디 답변은 체념의 다른 표현이다.

승자독식, 소수 우등생만 인정하는 체제

 "성적 등 계량화시킬 수 있는 결과만 놓고 보면, 문제 삼을 만한 건 전혀 없다. 공정성에서 흠결이 없고, 그들은 그런 상들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문제는 학교가 '그들만을 위한 리그'로 굳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이다."
"성적 등 계량화시킬 수 있는 결과만 놓고 보면, 문제 삼을 만한 건 전혀 없다. 공정성에서 흠결이 없고, 그들은 그런 상들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문제는 학교가 '그들만을 위한 리그'로 굳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이다."sxc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지만, '진짜' 주인은 공부 잘하는 학생이다. 지난 1년을 반추해보니, 놀랍게도 교사인 나 역시 몇몇 우등생들과 관련된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수업태도가 나무랄 데가 없었고, 때때로 수준 높은 질문을 던졌으며, 토론할 때도 발군이었다. 모둠 수업도 잘 이끌었고, 중간과 기말시험의 성적도 물론 뛰어났으며, 심지어 글씨도 잘 썼다.

그들의 이름은 매월 선행상 시상식 때도 어김없이 들을 수 있었고, 운동도 곧잘 해 체육대회 때 학급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여러 동아리의 대표였으며, 과목별 경시대회도 오롯이 그들의 차지였다. 국어, 영어, 수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과학, 심지어 제2외국어 과목까지 싹쓸이했다. 학교 역시 경시대회를 그들의 독무대로 만들 참이었는지, 그들의 요구대로 일정을 겹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 우승, 수학 경시대회 우승, 사회 논술 경시대회 우승, 중국어 퀴즈대회 우승. 한 아이가 방학식 날 동시에 받은 과목별 상 목록이다. 이런 걸 두고 '다재다능'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수차례 반복해서 불리는 그의 이름에 다른 친구들의 박수 소리마저 뜨뜻미지근하다. 학교생활기록부 수상실적에는 어느 것부터 적어야 하나 고민스러울 것 같다. 하긴 과목별 2등과 3등의 이름도 한두 명을 제외하곤 대개 같다.

흔히 명문대에 진학해서 모교를 빛낼 아이들이기에 대학입시를 위해서라도 '몰아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들 말한다. 진학 실적에 목매단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 대부분이 그럴 거라면서. 그런데 솔직히 그런 학교의 '배려'가 없더라도 그들은 전 과목, 여러 분야에서 출중하다. 근래 들어선 영어 잘하는 아이가 수학도 잘하고, 노래 잘 부르는 아이가 운동도 잘한다.

성적 등 계량화시킬 수 있는 결과만 놓고 보면, 문제 삼을 만한 건 전혀 없다. 공정성에서 흠결이 없고, 그들은 그런 상들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문제는 학교가 '그들만을 위한 리그'로 굳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이다.

시상이 있던 날, 초등학교 졸업 이후 단 한 번도 상이란 걸 받아본 적 없다는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 박수치러 온 것 같다'며 푸념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탓할 순 없지만, 학교의 '승자독식' 관행은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수업의 내용과 방식조차 소수의 그들에게 맞춰지기 일쑤고, 아이들의 원만한 교우 관계에도 장애가 된다.

아이들은 방학이라는 말에도 전혀 설레어 하지 않는다. 학생 사이에서는 '새해에도 학교는 달라질 것 전혀 없다'는 체념이 뿌리 깊다.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학교의 존재 이유조차 잊은 지 오래다. 그렇듯 교육이 사라진 자리엔 낡은 관행만 살아남았다. 야간자율학습이 자율이 아니듯, 방학 보충수업도 필요해서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관행일 뿐이다. 그게 다 무기력 때문이고, 그걸 조장한 곳이 학교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학교 #승자독식 #야간자율학습 #방학 보충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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