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등 계량화시킬 수 있는 결과만 놓고 보면, 문제 삼을 만한 건 전혀 없다. 공정성에서 흠결이 없고, 그들은 그런 상들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문제는 학교가 '그들만을 위한 리그'로 굳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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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지만, '진짜' 주인은 공부 잘하는 학생이다. 지난 1년을 반추해보니, 놀랍게도 교사인 나 역시 몇몇 우등생들과 관련된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수업태도가 나무랄 데가 없었고, 때때로 수준 높은 질문을 던졌으며, 토론할 때도 발군이었다. 모둠 수업도 잘 이끌었고, 중간과 기말시험의 성적도 물론 뛰어났으며, 심지어 글씨도 잘 썼다.
그들의 이름은 매월 선행상 시상식 때도 어김없이 들을 수 있었고, 운동도 곧잘 해 체육대회 때 학급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여러 동아리의 대표였으며, 과목별 경시대회도 오롯이 그들의 차지였다. 국어, 영어, 수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과학, 심지어 제2외국어 과목까지 싹쓸이했다. 학교 역시 경시대회를 그들의 독무대로 만들 참이었는지, 그들의 요구대로 일정을 겹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 우승, 수학 경시대회 우승, 사회 논술 경시대회 우승, 중국어 퀴즈대회 우승. 한 아이가 방학식 날 동시에 받은 과목별 상 목록이다. 이런 걸 두고 '다재다능'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수차례 반복해서 불리는 그의 이름에 다른 친구들의 박수 소리마저 뜨뜻미지근하다. 학교생활기록부 수상실적에는 어느 것부터 적어야 하나 고민스러울 것 같다. 하긴 과목별 2등과 3등의 이름도 한두 명을 제외하곤 대개 같다.
흔히 명문대에 진학해서 모교를 빛낼 아이들이기에 대학입시를 위해서라도 '몰아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들 말한다. 진학 실적에 목매단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 대부분이 그럴 거라면서. 그런데 솔직히 그런 학교의 '배려'가 없더라도 그들은 전 과목, 여러 분야에서 출중하다. 근래 들어선 영어 잘하는 아이가 수학도 잘하고, 노래 잘 부르는 아이가 운동도 잘한다.
성적 등 계량화시킬 수 있는 결과만 놓고 보면, 문제 삼을 만한 건 전혀 없다. 공정성에서 흠결이 없고, 그들은 그런 상들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문제는 학교가 '그들만을 위한 리그'로 굳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이다.
시상이 있던 날, 초등학교 졸업 이후 단 한 번도 상이란 걸 받아본 적 없다는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 박수치러 온 것 같다'며 푸념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탓할 순 없지만, 학교의 '승자독식' 관행은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수업의 내용과 방식조차 소수의 그들에게 맞춰지기 일쑤고, 아이들의 원만한 교우 관계에도 장애가 된다.
아이들은 방학이라는 말에도 전혀 설레어 하지 않는다. 학생 사이에서는 '새해에도 학교는 달라질 것 전혀 없다'는 체념이 뿌리 깊다.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학교의 존재 이유조차 잊은 지 오래다. 그렇듯 교육이 사라진 자리엔 낡은 관행만 살아남았다. 야간자율학습이 자율이 아니듯, 방학 보충수업도 필요해서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관행일 뿐이다. 그게 다 무기력 때문이고, 그걸 조장한 곳이 학교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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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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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계획이 뭐니?"... 아차, 괜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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