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지는 비밀, 번개 나들이에 대흥분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52] 마흔을 준비하는 서른아홉의 계획, '육아 2기'를 시작하며

등록 2016.01.17 20:54수정 2016.01.1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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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 저 일 정신없이 분주했던 지난해 12월, 휴가처럼 일정이 없는 하루가 생겼다. 일정은 없어도 낡은 창문에 방한 비닐과 뽁뽁이도 붙이고, 개집도 보온을 해줘야 했지만 쉬고 싶었다. 아무 일 없이. 그래서 남편과 토요일 아침 이불 속에서 급하게 작전을 짰다. 아침도 먹지 않고 아이들을 차에 태웠다.


번개 나들이... 온천 워터파크로 가자!

주택으로 이사 오니 가장 힘든 것은 단열이 안 되는 낡은 욕실이었다. 빨리 씻긴다 해도 아이들을 샤워시키기에는 추운 욕실 사정에 2주에 한 번씩 동네목욕탕에 다니고 있었다. 목욕탕을 핑계 삼아 아이들에겐 목적지를 반쯤 숨긴 번개 나들이를 나섰다. 목적지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온천. 그러고 보니 이사온 뒤 거의 동네에서 여러 일을 하며 주말을 보냈던 터라 아이들과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신난 삼남매! 어디 한 번 원없이 놀아봐라!
신난 삼남매!어디 한 번 원없이 놀아봐라! 이희동

동네목욕탕 가는 줄 알고 나선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냐 계속 물어댔지만 목적지가 나타날 때까지 '비밀'! 워터파크가 있는 온천이 나타나자 아이들은 '대흥분'! 온천 앞에서 아점으로 설렁탕을 든든하게 먹고 워트파크로 입성했다. 여름휴가 때 입었던 수영복을 꺼내 입히니 아이들은 그새 또 자라 있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차례로 입었던 수영복은 작아져 아무도 입을 수 없게 됐고, 7부였던 막내의 얇은 수영복은 3부가 됐다. 올겨울이 마지막일 듯했다.

첫째는 남의 집 아이처럼 우리를 찾지 않고 혼자 터득한 수영을 하느라 바쁘고, 수영장 분위기가 낯설어 한 시간 동안 안겨 있어야 했던 둘째는 입장과 동시에 누나를 따라 다람쥐처럼 곳곳을 누볐다. 막내만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미끄럼틀이 무섭다며 올라가지도 못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곧 누나와 형을 따라 물놀이를 즐겼다.

아무 일 없이, 원 없이 한번 놀아보자


개장과 거의 동시에 들어온 터라 수영장은 한산했다. 막내만 눈으로 봐주면 될 정도니 한산한 분위기만큼 우리 부부의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온천욕을 좋아하는 난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은 시간마다 열리는 아찔한 워터슬라이드를 타고 또 탔다.

그동안의 물놀이는 두어 시간 놀고 나면 그 당시의 막내(두 돌 이전의 첫째이기도 했고, 둘째, 셋째이기도 했던)의 컨디션 때문에, 혹은 다른 일정 때문에 마무리해야 했다. 그날도 세 시간을 넘기자 막내가 졸린지 조금 칭얼대기 시작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재미난 세상 앞에 있는 힘을 다해 졸음을 쫓고 놀았다. 그렇게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중간에 간식 조금 먹고 계속 놀았다.


놀다가도 불안한지 집에 언제 가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너희들이 가자고 할 때까지 놀 거니 계속 놀아"라고 답해주니 아이들은 눈치 보지 않고 정말 원 없이 물놀이를 즐겼다. 늘 뭔가에 쫓겨 다녔던 일상이었다. 노는 것도 일하는 것도 시간이 부족했고, 숙제처럼 해야 할 다른 일이 남아 있었다. 일이든, 놀이든 순간과 오늘을 즐기지 못했다. 단순하게 일정을 짜면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엄마, 나 혼자 수영할 수 있어! 비록 구명조끼 수영이지만 스스로 깨친 수영에 신이 난 산들이
엄마, 나 혼자 수영할 수 있어!비록 구명조끼 수영이지만 스스로 깨친 수영에 신이 난 산들이이희동

넉넉한 시간으로 한 뼘 자란 아이들

집에 가자는 말도 듣지 않고 마음껏 놀던 아이들은 몸으로 충분히 익숙해진 공간에서 새로움을 찾기 시작했다. 튜브에만 의지해 물놀이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튜브 없이 구명조끼만 입은 채 깊은 풀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있었다. 가르쳐 줄 때는 겁이 난다면서 싫다 하던 아이들이었는데.

까꿍이는 잠수까지 하며 제법 수영을 했고, 산들이는 간식을 먹느라 잠시 구명조끼를 벗었다 다시 입는 걸 깜빡하고 풀장에 들어갔지만 당황하지 않고 헤엄을 쳐 올라오기도 했다. 어린이 미끄럼틀도 무섭다던 복댕이는 제법 높고 긴 유아 슬라이드를 봅슬레이 선수처럼 타고 내려왔다. 엄마 아빠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난 시간과 공간을 얻게 된 아이들의 짜릿한 '성장의 물놀이'였다.

아이들이 그렇게 스스로 깨쳐가는 동안 남편과 난 각자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신혼여행 때처럼 오붓하게 온천욕도 하고 맥주도 마시며 지난 6년의 세월이 공으로 흐르진 않았음에 감사해 했다. 여름까지만 해도 물놀이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린 곳에서 매의 눈으로 아이들을 봐야 하는 노동이었는데. 아이들을 키우는 매 순간은 참 힘들고 지루하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이들은 저 혼자 쑤욱 자라 부모에게 뿌듯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주는 존재가 돼 있다.

그 작던 아이가 이렇게들 자랐다. 봐도봐도 신기한 일.
그 작던 아이가이렇게들 자랐다. 봐도봐도 신기한 일.정가람

이제야 되돌아보는 20대 그리고 30대

집으로 돌아오는 밤, 아이들은 모두 단잠에 들고, 바쁘게 보낸 2015년을 돌아봤다. 세 아이 키우랴, 엉성한 살림 끼워 맞추랴, 마을극단 밥상을 비롯한 마을사업 함께하랴, 글 쓰랴…. 참 바쁘게 지냈다.

더 이상 젖 먹이고 업어 재워야 하는 어린 아기도 없는데 바쁘고 또 바빴다. 바쁘기는 남편도 마찬가지. 마당이 있는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를 온 후 집에 있는 주말에도 자잘한 집수리부터 감 따기, 반려견 산책 등 아파트 살이와는 차원이 다른 집안일을 해내야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동안 세 아이들은 훌쩍 자랐다. 봄에 입던 옷이 가을에 맞지 않고, 지난해 신던 겨울 신발이 작아져버렸다. 그만큼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을 세심한 마음으로 살펴줬나 하는 반성이 고개를 든다. 여러 일에 치여 아이들이 자라나는 빛나는 순간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일 우리 부부의 다시 못 올 순간도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해가 바뀌어 서른아홉, 30대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40대를 준비하며 돌아보는 20대와 30대는 참 숨 가쁜 시간들이었다. 뭔가 많은 일을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원 없이 매달려봤던가, 단 하나인 그 무엇에 후회 없이 내 모든 걸 쏟아부었나, 이제야 돌아본다. 하루하루 닥친 일을 해내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시간들이 저만치 가버렸다.

노는 게 젤 좋아! 친구들 모여라. 친구가 되어 가는 삼남매
노는 게 젤 좋아!친구들 모여라. 친구가 되어 가는 삼남매정가람

야호! 나이 먹었다! 나이 먹는 게 자랑인 때가 있었지.
야호! 나이 먹었다!나이 먹는 게 자랑인 때가 있었지.정가람

내 안의 균형

2016년엔 까꿍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여섯 살이 되는 산들이도 어린이집에 가게 됐다. 젖먹이 육아 1기가 마무리되고 학부모 육아 2기가 시작된다. 마을극단도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보다 더 조직적인 계획을 세워 달려가 보려고 한다. 학교와 어린이집, 마을극단까지 쫓아다니다 보면 지난해보다 더 바쁜 날들일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갈 수도 있겠지만 이 일 저 일에 쫓겨 부실하게 바쁜 날은 보내지 말아야겠다. 뭐든 먼저 나서서 해결해주는 학부모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와 힘을 줄 수 있는 부모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고, 나눔으로 가벼워지고 배가 되는 마을이라는 울타리의 힘을 길러가고 싶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잘 쪼개 쓰는 지혜와 더불어 가끔씩은 오직 나만을 위해 뭔가를 원 없이 하는 시간의 틈도 조금씩 늘여 봐야지. 그렇게 비워진 시간은 엄마의 자리를 위해 접어뒀던 나 자신의 시간으로 하나씩 채워 내 안의 균형을 찾고 싶다.

전력질주보다는 긴 호흡으로 나에게 집중하며 새로 시작되는 육아 2기와 건강한 40대를 준비하는 한 해가 되길. 새해 아침, "난 이제 여덟살이다." "난 여섯 살이지롱!" "난 이거!" 하며 자랑스럽게 손가락을 펼치면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처럼 나도 멋지게 내 나이를 자랑할 수 있게!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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