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끓였건만... 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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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며 감자, 당근, 양파를 다듬고 네모나게 썰고 볶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실과'와 '가정' 과목을 통해, 제대로 된 맛을 내는 요리는 할 줄 몰라도 요리를 어떻게 하는 지 정도는 배운 덕분이랄까요?
문제는 재료를 볶은 후부터였습니다. '8명씩이나' 먹을 양이니 저희는 준비된 그릇 중에서 가장 큰 '들통'에 재료를 넣고 끓였습니다. 들통아시죠? 집에서 빨래를 삶거나 곰국을 끓일 때 쓰는 커다란 통.
다른 반찬은 굳이 필요 없고, 밥은 준비됐고, 재료가 끓어 익으면 카레가루를 넣고 살짝 끓이다가 밥과 비벼 먹으면 되는데, 이런…. 재료가 끓을 생각을 않는 겁니다. 휴대용 가스버너의 가스가 다 닳아져 새것으로 바꾸기까지 했는데 영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죠.
얼른 저녁을 먹고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데 우리 조가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다들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조원들은 언제 밥이 되냐고 계속 물어보고, 다른 조의 선생님들도 '너희들은 언제 밥 먹냐'고 계속 묻고, 재료는 끓을 생각을 않고….
우리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리가 밥 먹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얼굴은 달아오르고. 괜히 카레를 먹자고 했나 보다 후회는 밀려오는데 어찌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렇게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죠.
정말 아무도 만드는 법을 몰랐을까결국 기다림에 지치신 선생님께서 찌개로라도 먹게 작은 그릇에다가 조금만 덜어서 만들어보자고 하시면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도 끓을 생각을 않던 재료들이 작은 그릇으로 옮기자마자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일인데도 참 신기하더군요.
더 웃긴 건 작은 그릇에 옮겨 만든 카레만으로도 우리 조원들은 물론이고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름 출출했던 다른 조의 친구들까지 먹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카레로 국을 끓였어도 들통까지는 필요 없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저녁밥을 먹고 치우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10시를 훌쩍 넘겼고, 그날 저녁에 예정됐던 모든 프로그램은 '카레' 때문에 취소됐습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날 두어 시간 동안 재료가 끓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시간은 제 인생 중에서 짧지만 가장 길면서도 가장 느리게 흘렀던 시간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선생님들 아니 '어른' 중에 카레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정말 없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그냥 지켜본 것인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로 카레 재료를 볶고 난 뒤 재료를 익히기 위한 물은 재료가 적당히 잠길 정도면 됩니다. 재료가 익었는지는 가장 단단한 재료인 당근 하나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서 쏙 들어가는지로 확인하면 되고요. 그리고 저 지금은 카레 잘 만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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