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대신 기저귀 찬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

[서평] 엠마뉘엘 베르네임 장편소설 <다 잘된 거야>

등록 2016.02.02 12:59수정 2016.02.0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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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8일 국회에서 이른바 '웰다잉(Well-Dying)법'이 통과됐다. 웰다잉법의 정식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이다. 1997년 '보라매 병원 사건'을 계기로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치료를 중단한 의사와 가족들은 법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19년 만에 연명치료에 관한 법적인 기준이 마련된 셈이다.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8년부터 시행되는 '웰다잉법'은 존엄사와 소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했을 뿐 안락사를 전면적으로 승인한 건 아니다. 임종기 환자의 의사결정에 따라 회생 불가능한 의료 행위를 중단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인정한 것뿐.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몇 안 된다. 약물주사 주입 방식의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한 국가는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의 오리건주뿐이다. 인공호흡기 등을 제거하는 소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는 그에 비해 많은 편에 속한다. 스위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일본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 맞이하는 죽음의 형세는 어떨까. 국민의 절반 이상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생을 마친다. 말기 환자의 사망 전 3개월간의 의료비는 지난 1년간 쓴 의료비의 절반 수준이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비싼 연명치료를 받다 병실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 현재의 세태다.

나의 아버지의 죽음도 그랬다. 막바지임을 직감했지만, 막상 치료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새로운 항생제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그래도 고열이 잡히지 않는다면, 퇴원할 계획이었다. 그 순간, 중환자실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을 아버지의 운명에 사인한 것인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전화를 받고 중환자실로 달려갔지만, 아버지의 숨은 벌써 세상을 떠난 뒤였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지막 순간 아버지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눈망울은 뜬 눈 그대로였다. 간격이 좁아지는 숨결 사이로 간절히 그리웠던 것은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시선 속에 닿은 건 의사의 가운과 병실의 벽뿐이었다.

죽음을 향한 아버지의 외로운 질주


 엠마뉘엘 베르네임 <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다 잘된 거야>작가정신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장편소설 <다 잘된 거야>는 나의 아버지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1인칭 시점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지난한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간결한 문장과 현재형의 시제는 마지막 순간의 긴박함을 자아내는데 효과적이었다.

이 소설은 베르네임의 자전소설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회상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더구나 안락사를 원했던 아버지의 죽음이라면 되짚고 싶은 마음은 한 조각도 없을 듯하다. 그녀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도둑맞았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글을 쓰는 것이 내 이야기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279쪽)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굴레라면, 인간답게 죽고 싶은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뇌혈관 사고로 반신마비가 온 아버지 앙드레를 바라보면서 뉘엘은 생각했다.

"내 아버지가 시들어가고 있다." (78쪽)

아버지는 손녀딸과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는 여행가였다. 전시회와 음악회를 관람하는 문화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맛있는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즐기는 미식가였다. 그런 아버지가 침대 시트에 누워 냄새나는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했다. 삼키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은 식사를 해야 했다. 망가져버린 육신의 괴로움을 짊어지기에 아버지는 지쳐있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선택하고 싶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61쪽)

아버지가 자식에게 건네는 이 섬뜩한 한 마디에 가슴이 파르르 떨려왔다. 자식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아버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작가는 자살 대신 안락사를 선택했던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통속적인 눈물바람을 일으킬 어떤 소설적 장치도 마련하지 않았다. 강렬한 의지와 구체적인 행동만을 묘사했다. 그건 아버지의 죽음을 세상 앞에 내어놓으려는 작가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도둑맞게 한 세상을 향해 건네는 차분한 독백이었다.

뉘엘은 동생 파스칼과 함께 죽음을 향한 아버지의 특별한 여행을 준비해나갔다. 아버지는 안락사 병원이 있는 스위스로 떠날 계획에 동의했다. 갖춰야 할 서류들이 많았다. 의료진단서, 안락사 단체 회원 카드, 죽음에 동의하는 자필서, 스스로 택한 죽음임을 증명하는 친지들의 서약서. 손으로 글씨를 쓰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뉘엘은 동영상을 찍기로 했다. 아버지는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심정을 침착하게 밝혔다.

"이런 삶은 나와 관계가 없다. 끝난 것이다. 나는 이제 움직일 수가 없고, 정상적인 삶의 아주 기본적인 동작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릴 수가 없다. (중략) 나는 이런 상태로 계속 지내고 싶지 않아. 너무 고단할 뿐이다. 이렇게 살아 있을 바에야." (227쪽)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소설이 출간된 지 2년 후인 2015년 3월에 프랑스는 '소극적인 범위의 안락사'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그 전엔 엄연한 위법행위였다. 법의 심판대에 불려나가 범법자가 되는 것도 두려웠지만, 아버지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는 괴로움이 더 컸다. 죽음의 문턱에서 오랫동안 헤매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당찬 결의가 어떻게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을지.

아버지가 세운 마지막 깃발처럼 죽음을 향한 외로운 질주가 곧 시작될 모양이었다. 아버지 앙드레는 무사히 국경을 넘어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을까. 평생 살아온 모국의 땅을 등진 채 홀로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 앙드레의 구급차가 어두운 밤길을 달린다. 과연 앙드레의 특별한 여정은 그토록 원했던 바람을 이뤄낼 수 있을까.

자택에 남은 뉘엘은 구급차 기사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아버지가 갈아달라고 했을까?" 그 순간,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를 위해 드는 걱정이 고작 눅눅해진 기저귀라니.

마음 속으로 차오르는 한숨들을 털어내며 뉘엘은 프랑스에서 스위스까지 가는 지도를 들척였다. 어린 아이의 몸으로 변해버린 아버지였지만 그 의식 속엔 죽음을 향한 뚜렷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다 잘된 거야" 라는 아름다운 이정표를 그 길 위에 세워두고 싶었다.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의 죽음'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질이 중요하다면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안락사에 대한 개인적인 편향까지 논의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의료행위가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점검해볼 필요는 있다.

앞으로 웰다잉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연명치료에 관한 환자 본인의 의사를 밝혀두는 문서를 미리 작성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 담당 의사가 작성하고 환자와 의사가 함께 서명하는 '연명의료계획서'와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 가능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다시 고칠 수 있다니, 이번 기회에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을 권리를 찾아나선 앙드레의 구급차가 현실적인 법과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생각들이 모여 법과 제도의 제한선이 조금씩 붕괴된다. 자식에게 버거운 짐을 지우면서까지 안락사를 선택한 아버지 앙드레가 일구어낸 것. 경계를 지키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것도 결국 인간임을 되새겨본다.
덧붙이는 글 <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작가정신/ 값 12000원

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2016


#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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