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3월 30일 발행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당시 이 책의 가격은 2,500환이었다
이정환
좋은 일만으로 '오늘의 나'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쁜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고, 부끄러운 일도 있었고, 이런 모든 일들이 나의 삶 속에 살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이럴진대 역사에 고난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선생 말씀대로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운 역사'라는 말은 어찌 보면 선생에게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고난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불의의 값을 지는 자다. 우리 불의냐 남의 불의냐, 물을 것 없다. 벌써 말하지 않았나? 불의도 의도 역사의 것, 인류의 것이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다. 마치 생과 사가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중략)... 우리 사명은 여기 있다.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않고 회피도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데 있다. 막연히 감상적으로 하는 말도 아니요, 억지의 곡해도 아니요, 시적으로 하는 비유도 아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세계를 건진다. 불의의 결과는 그것을 지는 자 없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선생에게는 이런 불의의 짐을 회피하는 종교는 생명의 원리는 물론 역사적 원리에 반하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이란 이데올로기를 국익 또는 애국심이란 명목으로 설파하는 행위 역시 선생에게는 불의입니다.
"성당, 법당 안에서만 경건하고, 눈물나고, 나오면 곧 말라버리는 그런 믿음, 우주 하나를 찢어 열 개 스무 개로 만드는 종교, 몇 사람을 행복스럽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불쌍한 사람을 영원히 가둬 두려 지옥을 마련하는 종교, 그런 따위 귀족주의 종교는 이 앞의 역사에는 소용이 없다. 생존 경쟁 철학 위에 서는 애국심은 이 앞의 세계에서는 배척이 돼야 한다."본래 정치란 묵인(默認)이기에...그러면 어머니가 이 책,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간직한 지 56년이 된 오늘,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신 지 꼭 27년이 되는 오늘, 지금 우리는 불의의 값을 어떻게 져야 할까요. 그 답을 선생이 남긴 두 글자, '묵인'이란 단어에서 찾습니다.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정치란 묵인(默認)이다. 임금질을 누가 해 달랬느냐? 정치를 누가 해 달랬느냐? 저희가 나서서 한답시고 떠드니, 사람 살기에 알맞게 하면 묵인해 두는 것이고, 잘못이 있어도 사람이란 평안을 요구하는 것이니 과히 심한 것 없으면 참을 대로 참다가, 정말 아니 됐으면 그때는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하고, 또 나서는 놈 중에서 비교적 그럴 듯한 것을 골라 맡기고 또 묵인해 두는 것이다. 그렇게 몇 천 년을 오던 것이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직접 하자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공유하기
"임금질을 누가 해달랬나? 정치를 누가 해달랬나?"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