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질을 누가 해달랬나? 정치를 누가 해달랬나?"

[달력 보는 남자] 1989년 오늘 함석헌 타계, 어머니가 54년간 간직한 '메시지'

등록 2016.02.04 16:41수정 2016.02.0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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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뉴스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뉴스 그 다음은 우리 삶과 '오늘'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만 쏟아지는 뉴스에 묻혀 잘 안 보일 뿐입니다. 어제 뉴스를 오늘의 이야기로 엮어보겠습니다. [편집자말]
"아빠의 추천으로 대학교 입학하기 전에 읽었던 책이에요. 요즘 너무 핸드폰만 끼고 사는 것 같아서 제 스스로가 스마트폰 중독이 아닐까 라는 무서움에(ㅎㅎ).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뭘 읽어야 할까 라고 책장을 뒤졌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책이 바로 함석헌 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요." (blog.naver.com/parkhy1122)

"젊은이들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읽고 나서 역사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고난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 또한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줄 것이다." (blog.naver.com/kpleton3)

지금으로부터 54년 전,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사셨던 이 책이 이를 증명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1962년 3월 30일이 발행일입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스물 두 살, 그 때 어머니가 지불한 돈은 2,500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몇 페이지 읽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읽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 책을 사셨겠지요. 그리고 꽃다운 그 시절을 상징하는 추억이기에 그렇게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도 차마, 버리지는 못하셨겠지요.

"의를 잠깐 억누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상당한 값 내야"

 1962년 발행된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사진
1962년 발행된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사진 이정환

새삼 이 책을 꺼내 든 이유는 1989년 오늘(2월 4일)이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폭력과 권위주의에 거부하며 시대의 불의와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이자 재야운동가. <씨알의 소리> 등으로 시민을 일깨우고자 했던 사상가 함석헌 선생.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신화의 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해방 후 6.25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선생 특유의 범종교적 시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입니다. 불의의 열매가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요즘이라 그런 걸까요? 참 오래 전 말씀이지만, 지금 읽어도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 참 많았습니다.


"의(義)는 값없이 그저 없어지는 일이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면 사람은 한때 의를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값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반드시 거기 상당한 값을 내어야 한다.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오는 불의의 열매는 도망할 수가 없다. 개인은 혹 그렇지 않은 듯이 뵈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풀이가 무슨 우리 민족의 숙명이라거나 그래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고난의 역사를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며, 또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생명의 원리요, 또한 역사의 원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우선 중요하게 던지는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입니다.


"보는 자리가 변하면 그 보이는 바가 다르다"

 어머니가 56년 간 간직하고 있었던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어머니가 56년 간 간직하고 있었던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이정환

"모로 보니 봉우리 재 옆에서 보니 봉우리,
곳곳마다 보는 산 서로서로 다름이,
여산의 참 얼굴 알아볼 수 없기는,
다만 내 몸 이 산 속에 있음이네." (선생이 책에서 인용한 소동파의 시)

"인생을 넘어뛰지 않고 인생 모른단 말이다. 역사 알아봄도 그와 같다. 보는 자리가 변함을 따라 그 보이는 바가 서로 다르다."

함석헌 선생이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을 설명하면서 쓰신 글입니다. 선생은 "사실이란 내 주관과는 관계없이 따로 서서 객관적으로 뚜렷이 있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에는 주관의 렌즈를 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이란 없다"며 "사실은 결국 사실이라고 알려진, 혹은 해석된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골라진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선생이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은 역사의 정의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질문부터 바로 대해야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살아나면서, 어제와 오늘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에게 '어제'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 현금(現今)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해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적히는 과거는 마구 하는 생각으로 하면 지나가 버린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단순한 과거가 아니요, 우리 현재의 살림 속에 살아 있는, 말하자면 산 과거다."

"우리는 불의의 값을 지는 자다"

 1962년 3월 30일 발행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당시 이 책의 가격은 2,500환이었다
1962년 3월 30일 발행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당시 이 책의 가격은 2,500환이었다 이정환

좋은 일만으로 '오늘의 나'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쁜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고, 부끄러운 일도 있었고, 이런 모든 일들이 나의 삶 속에 살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이럴진대 역사에 고난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선생 말씀대로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운 역사'라는 말은 어찌 보면 선생에게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고난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불의의 값을 지는 자다. 우리 불의냐 남의 불의냐, 물을 것 없다. 벌써 말하지 않았나? 불의도 의도 역사의 것, 인류의 것이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다. 마치 생과 사가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중략)... 우리 사명은 여기 있다.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않고 회피도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데 있다. 막연히 감상적으로 하는 말도 아니요, 억지의 곡해도 아니요, 시적으로 하는 비유도 아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세계를 건진다. 불의의 결과는 그것을 지는 자 없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선생에게는 이런 불의의 짐을 회피하는 종교는 생명의 원리는 물론 역사적 원리에 반하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이란 이데올로기를 국익 또는 애국심이란 명목으로 설파하는 행위 역시 선생에게는 불의입니다.

"성당, 법당 안에서만 경건하고, 눈물나고, 나오면 곧 말라버리는 그런 믿음, 우주 하나를 찢어 열 개 스무 개로 만드는 종교, 몇 사람을 행복스럽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불쌍한 사람을 영원히 가둬 두려 지옥을 마련하는 종교, 그런 따위 귀족주의 종교는 이 앞의 역사에는 소용이 없다. 생존 경쟁 철학 위에 서는 애국심은 이 앞의 세계에서는 배척이 돼야 한다."

본래 정치란 묵인(默認)이기에...

그러면 어머니가 이 책,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간직한 지 56년이 된 오늘,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신 지 꼭 27년이 되는 오늘, 지금 우리는 불의의 값을 어떻게 져야 할까요. 그 답을 선생이 남긴 두 글자, '묵인'이란 단어에서 찾습니다.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정치란 묵인(默認)이다. 임금질을 누가 해 달랬느냐? 정치를 누가 해 달랬느냐? 저희가 나서서 한답시고 떠드니, 사람 살기에 알맞게 하면 묵인해 두는 것이고, 잘못이 있어도 사람이란 평안을 요구하는 것이니 과히 심한 것 없으면 참을 대로 참다가, 정말 아니 됐으면 그때는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하고, 또 나서는 놈 중에서 비교적 그럴 듯한 것을 골라 맡기고 또 묵인해 두는 것이다. 그렇게 몇 천 년을 오던 것이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직접 하자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함석헌 #씨알의 소리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송곳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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