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두저촌 남문마을 남문에 조선의용대원들이 강제 징집된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 부대를 이탈하여 조선의용대로 찾아 오라'는 문구가 남아있다. 이곳 주민들이 매년 덧칠 작업을 해 당시의 우리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박진우
또 하나의 반가움은 운두저촌 남쪽의 전각(당시 운두저촌의 남문으로 추정)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前志願兵"과 "왜놈의 上官(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요!"라는 우리의 글이 흰색 페인트로 생생하게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1941년 당시 항일전투를 하는 조선의용대가 강제 징용된 조선의 청년들을 위해 쓰여진 글귀로 보이며, 운두저촌의 현지 주민들은 이 글귀를 제대로 쓸줄도 읽을 줄도 모르지만 감사하게도 이 글의 시대적 의미를 알고 있는듯 그당시로부터 생생히 남겨진 역사의 한 장면이 지워지지 않도록 매해 흰색으로 덧칠을 하며 중국과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에 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41년 11월에 섭현 운두저촌에서 팔로군과 일본군이 대치중인 원씨현(元氏县) 호가장(胡家庄)마을로 무장 선전대원 30여명을 보내어 중국 인민들을 상대로 민중대회를 열고 적군의 선전공작을 하였다. 그러나 새벽에 일본군 500여명이 호가장 마을을 포위하여 공격해 왔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마지막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선생과 김세광선생이 부상을 당하여 체포되고, 4명의 조선의용대와 중국군 12명도 사망하는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호가장 마을 입구에는 12명의 중국인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있었으며, 그 양쪽으로 김사량(동경대 출신으로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에 합류하고 노마만리를 씀)선생과 김학철선생의 항일문학비가 서 있었는데 쇠귀 신영복선생의 글과 글씨체로 기념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호가장 마을을 방문한 날이 쇠귀 신영복선생의 일포제가 있는 날이어서 추모의 뜻을 기리는 묵념을 하는데도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이번 순례길에 함께 한 쇠귀선생의 조카인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성영 소장은 호가장 방문전날 한국에서의 비보를 듣고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하셨던 우리 아제가 가셨다'며 슬픔을 못이겨 눈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호가장 마을에는 당시 조선의용대가 부르던 우리말로 된 노래 '불멸의 영령'을 불러주며 조선의용대의 기개와 결의를 회상시키던 호숙영씨는 없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방문물로 지정된 조선의용대 주둔지와 격전지를 직접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순례단중 한 청년은 주둔지내의 대피시설인 우물로 위장된 수직굴로 직접 내려가 살펴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