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당시 육영수 피격 모습을 담은 현장 영상
SBS '그것이 알고싶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께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4발은 저격범이 쏜 것이고 3발은 경호원들이 쏜 총알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대통령 부인 육영수에게 맞았다. 정부 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만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대학(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던 22살의 박근혜 대통령(아래 박근혜)은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어느날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니 급히 짐을 싸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는다. 박근혜는 탑승 수속을 받던 파리 공항에서 신문 1면에 실린 '암살'이라는 글자와 어머니 사진을 보고서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면서 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 당시의 심경을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날마다 어머니의 죽음이 일일 드라마처럼 수시로 방영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범인은 일본 여권을 가진 간첩 문세광으로 밝혀졌다. 배후세력에는 조총련이 도사리고 있으며 북한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었다."(박근혜,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위즈덤하우스, 2007년)
박근혜,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같은 표현에서 박근혜의 북한에 대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박근혜는 이후 학업(유학)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의 길을 걷는다. 박근혜는 자서전에 이때의 '정치수업'에 대해 "아버지가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면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록했다. 또한 "'국익 최우선'이라는 아버지의 정치신념은 확고했다"면서 "화가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미적 감각을 습득하는 것처럼, 나는 대통령인 아버지를 통해 외교감각을 익히고 다른 나라의 정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노하우를 배웠다"고 기록했다.
70년대는 김일성이 통일전선전략을 펼치는 가운데 남북한이 극심한 체제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75년 4월30일 월남이 북베트남에 패해 베트남전이 종결(당시는 '베트남 공산화')되자 인도차이나 사태로 인한 안보 위기가 고조되었다.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김일성은 베트남 통일에 고무되어 남한 민중의 호응에 의한 통일을 낙관했다고 한다. 육영수 저격으로 시작된 '북괴 규탄 안보궐기대회' 같은 관제데모는 '베트남 공산화'로 더 빈번하게 열리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는 북한과 재일총련(조총련)과의 연계를 끊을 본질적 해법으로 제시한 '조총련계 모국 방문단 사업'을 두고 갑론을박했다. 조총련계 모국 방문단 사업은 문세광 사건 이후 74년말 정보부 차장보를 하다가 주일공사로 간 조일제(10-11대 국회의원 역임)의 아이디어였다. 조일제의 아이디어는 '참신'했지만 정보부로서는 '혁신적'인 그 내용을 차마 청와대에 건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75. 5. 21) 박정희는 김영삼을 청와대로 불러 "내자(內子)가 없으니 꼭 절간에 있는 것 같아요. 나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대통령의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보부로서는 영부인을 저격한 조총련계의 모국방문을 건의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대통령의 이런 사정을 잘 알기에 정보부가 '채홍사' 역할까지 담당한 사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10.26 사건의 법정 재판에서 드러난 바 있다.
모국 방문사업, 조일제 아이디어→김영광 건의→박정희 재가김영삼과의 영수회담 이후 어느 날 박정희는 청와대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김영광(14대 국회의원 역임) 중정 판단기획국장, 그리고 박경원 내무부장관 등을 불렀다.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환담을 하던 박정희는 아무 말 않고 듣기만 하는 김영광에게도 "좋은 생각 있으면 얘기 해보라"고 말을 시켰다. 이때 박정희와 김영광 사이에 오간 대화는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폴리티쿠스, 2012년 개정증보판)에 자세히 나와 있다.
"각하, 작년의 문세광 사건 이후 재일 조총련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이고 각하의 영도력을 보인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대통령은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조총련이라는 말에 눈빛이 달라지면서 역겨운 기색이었다. 좌중은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고 김영광은 후회했다. 남산에 돌아온 신직수 부장은 김 국장을 질책했다. "왜 각하께 조심하지 않고 그런 말을 불쑥하오. 그쪽(조총련)은 영부인을 살해한 가해자인데 '가해자의 손을 잡고 각하 가슴에 품으시라'고?"며칠 후 신 부장은 (김 국장의) 사표를 받은 대신 말했다. "각하께서 김 국장 의견을 세부 게획까지 짜서 보고하라고 하십니다." 박 대통령은 그걸 결심하면서 "근혜도 반대했어. 하지만 내가 대통령이기에 결심한 거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해서 좋은 성과를 얻어야 해" 하고 말했다.(<남산의 부장들>, 618~619쪽)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가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 눈에 띈다. 갑작스레 어머니를 흉탄에 잃은 23살의 나이를 감안하면 반대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2007년 대통령선거에 나서면서 낸 자서전에도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러방지법은 '음지의 괴물에 날개 달아주는 격'이후 조총련계 신문들이 연일 "총련계 모국 방문사업이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짓이다"고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이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정은 공작적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야당의 대표적 여성 정치인 박순천에게 환영사를 하도록 기획했다. 그해 9월 15일 조총련계 제1차 모국 방문단 700명이 방문하자 그는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오신 동포 여러분! 일본으로 돌아가실 땐 고국의 흙 한줌씩을 봉투에 담아가셔서 이 땅을 생각하고 일본에 묻힐 땐 그 흙과 함께..."(<남산의 부장들>, 620쪽)'여당보다는 야당, 남자보다 여자 연사'를 내세운 중정의 기획은 방문단의 심금을 울리는 대성공이었다. 당시는 재일총련에서 만경봉호에 재일동포 조국 방문단을 경쟁적으로 태워 보내던 시절이었다. 결국 국정원이 자랑하는 조총련계 모국 방문 공작은 주일공사 조일제의 아이디어와 판단기획국장 김영광의 보고, 그리고 대통령 박정희의 '국익 최우선' 결정이 어우러져 성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