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보성예기치옥 기생들의 토산장려운동을 알리는 1923년 2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조종안
- 예기를 기생 출신이라고 천시하는 분위기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 같다. "기생을 말하면 창기(娼妓·삼류 기생)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어느 분야든 부정적인 면은 존재하므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생들이 천 년을 이어온 교방문화, 즉 우리의 전통 예술을 계승 발전시킨 공적을 무시할 수 없다. 군산 소화권번 출신 예기들이 1930년대 초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공연했다는 신문 보도는 당시 지방 예기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예기들은 일제강점기 대중스타였다. 예기 출신 가수와 배우가 많았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한제국 시절 매국노 이지용(을사오적)을 꾸짖고,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 나서는가 하면 기미년(1919) 삼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등 논개 정신을 계승한 의기(義妓)도 많았다. 1920~1930년대 군산 기생들도 금연운동, 토산품 장려, 이충무공 사업 성금 기탁, 경영난에 처한 조선인학교 돕기 자선공연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펼쳤다는 자료가 전해진다."
- 국내 무용 전문가들은 '민살풀이 본고장은 군산'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생각은?"예술을 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부채춤 고향도 군산 소화권번으로 신명숙 교수가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민살풀이도, 부채춤도 아주 귀한 문화·관광콘텐츠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번 장금도 관련 행사도 기생에 대한 잘못된 인식 전환과 자긍심을 갖는 동기부여가 됐으면 한다."
"군산의 예술 발전, 시민의 관심과 격려 필요해"- 일제강점기 군산에 권번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다가 이번에 3개로 확인됐다. 그동안 모르던 예기들의 다양한 활동도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인구 5만도 안 되는 군산에 권번이 세 개(보성권번, 군산권번, 소화권번)나 있었다는 뉴스를 보고 놀랐다. 군산의 유곽과 요정이 풍성했던 것은 쌀 수탈의 거점도시인데다 미두장(미곡취인소)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미두에서 돈을 날리고 스트레스가 쌓인 미두꾼들과 정미업자들이 밤에 유곽과 요정에서 술로 시름을 달래며 정보도 교환했다고 한다.
한편 권번이 많았다는 것은 전통 예술이 그만큼 활발했고, 더불어 전승자도 많이 배출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료에 따르면 영남 출신 김애정(金愛貞) 명창도 마산 남선권번에 들어갔다가 3년 만에 군산 소화권번으로 옮겨 졸업하였고, 김유앵(金柳鶯) 남도 명창도 군산 소화권번에서 가무를 익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국악원이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일찍 만들어진 것도 그에 연유한다고 본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사업은? "특별히 구상하거나 계획한 사업은 없다. 다만, 시민과 회원들에게 인정받는 예총이 되도록 모든 역량을 쏟으려고 한다.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창의적인 프로그램 개발, 예총 산하 8개 지부 사업 지원 등 군산 예술문화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겠다.
회장을 맡은 후 다양한 국내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올해는 그보다 많은 사업이 계획돼 있다. 예술인들의 재능기부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싶다. 대상은 환경이 열악한 단체와 학교, 소외계층(장애인, 다문화 가정 등)이다. 지역 예술 발전은 예술인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장금도 명인 행사도 마찬가지다. 시민의 격려와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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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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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도 춤 통해 전통예술의 소중함 보여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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