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근 교사가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터뷰가 진행된 교무실에 졸업을 하는 제자가 보낸 감사 화분이 놓여있다.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그는 선물을 받고 그냥 말 수 없어 제자들과 술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스무살이 돼 술집에 갈수 있는 나이도 됐고, 대학에 가서 술 먹고 체하지 않게 주도도 가르칠 겸해서요."술먹는 법까지 가르쳐 대학에 보내겠다는, 제자사랑이 남다른 그가 학교를 떠나 두 번째 인생을 잘 찾을 수 있을까.
전교조 1세대로서 두 번이나 타의에 의해 해직됐을 때마다 "내 자리는 학교"라며 복직을 위해 싸우고 법에 호소했던 그는 왜 이렇게 일찍 퇴직을 결정 한 걸까.
교사에서 교육운동가로, 해직교사에서 교육의원으로, 다시 교사로.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던 30년을 마무리하는 임 교사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남다른 이력 만큼 아쉬움도 클 법 한데, 그는 거듭 "너무 자유롭다.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 된다"고 말했다.
- 명퇴를 축하해야 한다고 해야 할지, 또 앞으로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기자의 휴대전화에는 지금도 임춘근 교육의원이라고 저장돼 있다)."학교 동료교사들과 전교조 조합원들도 다들 뜻밖이라며 서운해 하는데 나는 축하받고 싶다. 퇴직할 때 시원'섭섭'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자유로워 지는 기분이다. 영어로 리타이어(retire, 은퇴하다)라는 단어에 대해 나는 그 의미를 '다시(re) 바퀴(tire)를 끼운다'라고 해석한다.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고, 새 바퀴를 굴려 가는 것, 사회적으로 프레쉬맨(새내기)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나는 굉장히 자유롭고, 충분히 축하를 받고 싶다. 기쁘게 출발한다. 그리고 지금도 밖에서 의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제일 좋다."
-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좋다면서 일찍 퇴직을 하는 이유는 뭔가?"나는 지금처럼 현장체험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부터 아이들과 같이 학교에서 야영하고 바닷가나 서울로 나들이를 하곤 했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꿈을 키워 주고 싶었다. 교실 안에서보다 그런 경험들이 평생 가는 추억이 될 거라고 믿었다(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최근에도 그의 농가주택으로 학생들을 불러 고기를 직접 구워주거나, 1박2일 교과특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 앞에 설 때마다 교사로서의 열정이 사그러 들지는 않았나, 늘 점검하고 고민해 왔다. 거기에 자신있게 응답하지 못하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1~2년새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고 있더라."
- 교사 경력이 30년이지만, 실제로 학교에 있었던 시간은 20년 남짓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사를 넘어 우리나라 교육운동사와 의정사에서도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는데. "초임지인 홍동중학교로 발령난 첫 해(1987년) 전국교사협의회(전교조 전신)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중립성이 크게 훼손됐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협의회로는 법적보호가 되지 않아 교사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노동조합이었다. 전교조는 교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라기 보다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1500명에 이르는 그 많은 교사들을 해직시킬 줄 생각도 못했다. 발령 2년만인 1989년 첫 해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5년 뒤인 1994년에 복직된 이후 계속 예산에서 살고 있다. 복직 뒤 10년여 동안은 교과 연구와 학급운영, 체험학습 등 참교육 세부운영에 대한 고민과 연구에 전념했던 시간이었다. '공해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100쪽 짜리 환경관련 교육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고, 전교조 본부 문예부장을 맡아 교실안 졸음 쫓는 법, 체험학습 재미있게 하는 법 등을 발굴해 보급한 것이 기억난다. 전국에 400차례 이상 강의를 다니기도하고 2000년도 경향신문 55돌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55인, 문화일보 선정 2000년대를 움직이는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교조 예산지회장, 충남지부 사무처장, 충남지부장, 본부 사무처장 등의 직책도 맡았다. 2009년 두 번째 해직돼 2013년 복직 됐고, 2010년 6·4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 교육의원으로 당선돼 충남도의회 의정활동을 했다."
- 파란만장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하는 말인 것 같다. 두 번째 해직될 때 두려움은 없었나?"솔직히 두려웠다. 첫 해직때 먹고 살기 위해 택시기사, 학원강사, 영업사원을 전전하면서 막막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전교조 본부 사무처장 제안이 들어왔는데 가면 뻔히 구속될 것 같아 망설여졌다. 3차례나 가족회의를 열며 고민하는 내게 큰애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가시는게 맞다"며 용기를 줬다. 그리고 예상대로 2009년 11월, 4대강 사업·자립형사립고·용산철거 반대서명을 주도한 혐의로 이명박 정부 전국 최초로 해임됐는데 각오했던 것 보다 더 힘들더라.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였다. 나는 교사로 살고 싶었다.
아이들이 가장 좋고, 모든 게 아이들 때문에 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2010년 친환경 무상급식 운동 집행위원장을 맡아 충남도내 시군단위 조직을 꾸리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6·4지방선거에서 교육의원(4개 시군)에 당선됐는데, 2013년 대법서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에 어긋나므로 해임은 무효"라는 판결이 나면서 다시 교사로 복직돼 아이러니하게도 의원직을 상실하게 됐다. 당시 김종성 교육감 인사비리에 대해 의회에서 강경 발언했더니, 충남도교육청이 의원직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바로 복직 발령을 냈다. 의원 겸직금지 조항 때문에 의원직이 자동말소됐고, 학교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