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아파트로 이사한 후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자료사진.
연합뉴스
며칠 뒤 일입니다. 제가 사는 동의 주민들, 특히 젊은 주부들이 동 앞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층에 8세대가 사는 15층 아파트였는데 120세대 입주민들이 거의 나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저 무슨 반상회 비슷한 회의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집결한 입주민들이 근처 동으로 한꺼번에 몰려갔습니다. 직감적으로 이건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한 집단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웃 동과 무슨 분쟁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저씨! 어르신! 빨리 돌아오세요. 저희들이 모시고 갈테니 걱정 말고 같이 가세요."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카랑카랑한 젊은 주부들의 목소리가 향한 곳은 이웃 동의 경비실이었고, 그곳에는 몇 개월 동안 저와 함께 새벽과 자정을 맞이했던 경비원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어르신은 딸 같은 입주민들의 부름에 경비실 밖으로 나와 연신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깐깐하게만 느껴졌던 어르신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당시 제 어머니로부터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들었습니다. 경비원 어르신이 꼬장꼬장해 보이기는 했지만 주민들을 자기 가족처럼 잘 돌봐 주셨다고 합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보행을 돕고, 물건도 잘 들어 주시고, 어린 아이들 잘 챙겨주고, 아파트 입구를 깔끔하게 청소하시고,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의 출입을 철저하게 잘 관리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의 동대표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옆 동으로 쫓겨 갔다는 것입니다. 경비 어르신이 내몰린 이유가 하도 어이가 없는 일인지라 젊은 주부들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하고 집단행동을 통해 어르신을 다시 모셔오기 위한 실력행사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경비 어르신은 다시 주민들 품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집단적 실력행사가 그렇게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경험은 다시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마음을 뒤 흔들었던 그 날의 먹먹한 감동은 실로 잊기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 주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눈물을 훔치던 어르신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최근 90년대 초반, 제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게 만든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올해 2월 말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의 A아파트 입주자대표모임은 '통합전자보안시스템' 도입을 이유로 경비원 44명 중 35명에게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통합전자보안시스템' 도입으로 가구당 관리비 부담은 다소 경감되었을 것입니다. 이익과 손해를 화폐가치로 판단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경비원 감축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일지 모릅니다.
이와는 달리 서울 강서구 가양동 B아파트와 영등포구 양평동 C아파트의 입주민들은 최근 경비원 감축안을 주민투표에 부쳐 압도적인 표차로 그들의 해고를 막았다고 합니다. 이들 주민들은 관리비 절감 대신 '경비원과 함께 사는 아파트'를 택하였습니다. <경향신문>은 이들 아파트의 연속적인 선택을 두고 '공동체 바이러스'의 '따뜻한 전염'이라고 표현했습니다(2016.03.01 기사).
경기도 고양시 D아파트 입주민 한 분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이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아파트 경비원 감축안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천 원짜리 지폐 4장과 '저 4000원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엘리베이터에 부착했다고 합니다. 이 아파트 역시 주민투표 결과 경비원 해고 안건이 부결되었습니다. 차가운 계산 능력을 가진 합리적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세 아파트의 주민들은 경비원을 해고하여 월 몇 천 원의 금전적 이득을 챙길 기회를 날려버린 셈입니다.
앞의 A아파트의 경우 경비원 해고 절차가 단행되기는 했지만, 많은 주민들이 주민투표 과정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하고 경비원 해고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총 660가구 중 150여 가구로 구성된 'A아파트 주민모임'은 2월 15일 "대표회의의 통합보안시스템 설치 결의를 무효로 해달라"며 입주자대표회의와 회장을 상대로 서울남부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주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해고 통보를 받은 경비원들은 계속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고, 주민들은 경비원들이 쫓겨나지 않도록 정문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입주자대표회의와 달리 A아파트의 주민들 역시 금전적 이득을 팽개치고 경비원과 함께 사는 아파트를 택하려 하고 있습니다. 경비원을 해고하여 관리비를 절감하려는 안건을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시킨 아파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해고통보를 받은 경비원들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주민들도 비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 대신 공동체가 경비원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