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서정주의 주도로 창간된 생명파시인들의 동인지 《시인부락》
시인부락사
이제는 비록 낡은 건물로 서 있고, 과거와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보안여관은 나름대로 우리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뚜렷하게 남겨 놓았다. 지난 1936년 작가 서정주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에 짐을 풀고 투숙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내 이곳에서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의 시인들을 만나 그해에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였다. 비록 통간 2호로 종간되고 말았지만 이것은 '생명파'의 미적 이미지를 남긴 동인지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시인부락' 창간을 문학평론가마다 서정주의 문학적 성과로 높이 치켜 세워주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문학적 천재성에 대한 과대한 평가'와 '철저한 친일파일 뿐 아니라 해방 후로도 항상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는 혹독한 평가'가 대립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현재로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하나로 수렴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에는 여전히 친일세력의 후예들이 이 사회의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우리 사회의 대립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부락'은 일본에서 온 말하지만 그가 보안여관에 머무르며 한 일 가운데 가장 큰일이 바로 <시인부락> 창간이라고 하니 이와 관련된 것 하나만 지적하고 떠나고자 한다. 그가 동인지 <시인부락>이라는 명칭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락'은 일본에서 건너 온 말이다. 뿐만 아니라 부락에 사는 사람 즉 부락민을 일본에서는 부라쿠민(部落民, ぶらくみん)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불가촉천민을 표상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부락이란 표현은 정확하게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강요된 용어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동네' '마을' '고을'이라는 이름을 없애 버리고 '부락'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씌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조선사람 모두를 '부라쿠민'으로 격하시키겠다는 말이 아닌가. 문학천재로 불리는 그가 그 의미를 몰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특히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 시인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참고로 보안여관은 위와 같은 문학가들과의 인연으로 해방 이후 지방 문학예술인들이 서울에 자리 잡기 전에 장기투숙하는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군사독재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고객이었고 경호원 가족의 면회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보안여관을 '청와대 기숙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또 보안여관의 이름이 왜 '보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면서 유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일각에서는 청와대와 인접해 있어 '보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보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 보안여관의 동쪽 경복궁 건춘문 앞에 있었던 국군보안사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197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결국 12.12쿠데타를 주도하여 제5공화국을 만들었던 국군보안사. 인기 가수 서태지에 의해 '소격동'이라는 노래를 만들게 했던 곳. 이렇게 경복궁 서쪽에는 보안여관이 있었고, 동쪽에는 보안사가 있었다는 우연의 일치에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서정주기념관'에 전시되어야 할 것한편 서정주의 집 '봉산산방'은 관악구 남현동 1071-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 집은 1969년 그가 직접 지은 것으로 200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그리고 2003년 관악구에서 매입하여 2011년부터 '서정주기념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2015년 서울시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50년도 안된 2층 양옥집으로 건축학적가치는 전혀 없다. 이것이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면 그것은 오직 서정주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서울시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무척 궁금할 뿐이다.
이곳에 자살특공대(가미카제)로 사망한 조선청년의 죽음을 찬양한 그의 명시 '마쓰이 오장 송가'를 전시해두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과도한 요구다. 그 시는 이곳에서 쓰여지지도 않았고, 그 역시 지난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서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