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서원은 대구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지만 임진왜란 때 전소된다. 연경서원 일대의 연경동에 지어졌던 주택 등 건물들은 현재 아파트 단지 조성을 앞두고 대부분 철거되었고, 연경서원 인근의 것으로 여겨지는 구강당(九岡堂, 채씨 재실)만 이전 복원을 기다리며 폐허처럼 남아 있다.
정만진
1542년(중종 37),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세워진다. 그 후 경주 서악서원, 영천 임고서원, 해주 문헌서원 등이 연이어 설립된다. 자극을 받은 이숙량(李叔樑, 1519∼1592), 전경창(全慶昌, 1532∼1585) 등 대구 선비들도 서원 건립에 나선다.
이윽고 1563년(명종 18) 공사가 시작되고, 만 2년만인 1565년(명종 20)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이 완공된다. 창건 당시 연경서원의 건물은 모두 40여 칸이었다. 중앙에 정남향의 강당 인지당이 세워졌고, 그 앞 좌우로 동재 보인재와 서재 시습재가 건립되었다. 남문인 초현문의 서쪽에 동몽재를 두었고, 그 외에도 애련당 등 여러 건물들을 설치했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강학 공간과 앞 시대의 뛰어난 선비들을 제사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연경서원은 처음 세워질 때 사당이 설립되지 않았다. 연경서원에 사당이 추가된 때는 개원 후 48년이나 지난 1613년(광해군 5)이었다.
연경서원은 사당 없이 출범한 교육기관이었다연경서원은 강학 공간만으로 출발한 특이한 서원이었다. 이는 대구 선비들이 연경서원 설립의 목적을 교육 기관 개설에 두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구본욱은 논문 <연경서원의 경영과 유현(儒賢)들>에서 '(건립 당시에 사당이 없었던 것은) 연경서원이 선현을 추숭(追崇)하는 제향(祭享)보다는 강학(講學)에 중점을 두어 건립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라고 평가한다.
'연경(硏經)'은 한자 뜻만 풀이하면 '유교 경전 공부' 정도로 읽힌다. 그래서 연경이라는 단어는 문학적 비유가 녹아 있지도 않고, 자리잡고 있는 터에 서린 애환을 품고 있는 듯 여겨지지도 않는, 그저 딱딱한 느낌만 준다. 하지만 '연경서원'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선입견과 정반대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연경은 고려 태조 왕건의 옛일이 서려 있는 흥미로운 이름이다.
연경서원 이름에 얽힌 왕건의 옛일 927년, 포석정까지 진격하여 신라 경애왕을 죽인 후백제 견훤은 유유히 귀국 길에 올랐다.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전한 고려 태조 왕건은 먼 길 탓에 이제야 팔공산 아래에 닿았다. 머잖아 동화사 아래 좁은 골짜기에서 대혈투가 벌어질 시점이었다.
왕건은 잠시 짬을 내어 산책에 나섰다. 넘치는 여유를 감당 못해 한가로이 서성댄 행동은 물론 아니었고, 전투를 앞둔 만큼 지형 정찰과 민심 다독이기에 주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왕건은 금호강 인접 들판 마을에서도 노(老)련하게 농삿일을 해낼 남자 어른들을 볼 수 없었다(不). 모두들 전쟁터에 나간 탓이었다. '논밭을 잘 다스릴 장정들이 이렇게 없다니!' 하고 왕건은 탄식을 했다. 그 후 '불로(不老)'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