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C식당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IPC 매너 하우스
정혜선
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 일주일은 하루도 해가 나지 않고 흐린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많을 거라는 걸 이미 듣고 왔지만,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파티를 자주했습니다. 그들의 파티는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게 다였는데, 저는 그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무언가 대단한 지혜를 배워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 학생들은 그저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매일매일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던 저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안정감과 평화로움 속에서 이상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개설된 수업 중에서 제일 어렵다는 과목을 포함해서 빡빡한 시간표를 짰습니다. 유엔에서 25년간 일하다 2년 전부터 이곳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저의 담임 선생님 앙헬은, 제 시간표를 보더니 진지하게 수업을 줄일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사우스 코리아(한국)에서 왔지?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사람들은 정말 헌신적이다. 그들은 정말 잘하려고 하고, 잘 못해냈을 때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시간표를 너무 빡빡하게 짜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편안하게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겨라." 저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맞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배워가야 할 대단한 지혜는 삶을 즐기는 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학교에서 제일 어렵다는 수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디벨럽먼트 매니지먼트(Development Management)라고 불리는, 사회 문제를 발견하고 그를 풀어나가기 위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연습을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그 수업에서 저는 게트루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이 글은 제가 다시 학생이 되어 게트루드라는 덴마크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느린 학생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다선생님은 젊은 시절 유엔 산하 기관에서 일하셨습니다. 케냐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빈곤지역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일한 경험을 듣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살면서 저는 한번도 유엔에서 일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첫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학생들 서너 명끼리 조를 이루어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해 토론을 하게 했습니다. 그 수업을 듣는 유일한 아시아 학생이었던 저는, 18세 유럽 소년소녀들 사이에 섞여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지만, 외국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처음이었던 제가 유럽 학생들과 사회 문제에 관해 토론을 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3개월간의 수업이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듣고 말하는 것이 편안해진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말 못하는 바보나 다름 없었던 그 순간을 어찌 견뎌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최고로 좋은 교육을 받아보고 싶어서 덴마크로 왔는데, 실제로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상대적으로 말을 잘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느린 학생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주저없이 그것이 (교사로서든, 학생으로서든) 제가 겪은 최고의 교육적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제가 만났던 느린 학생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업을 하다가 어려운 단어나 내용이 나오면, 게트루드 선생님은 언제나 저를 보고 제가 이해했는지 확인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를 못하면 이해할 때까지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창피하고 미안해서 모르는데 아는 척한 적도 당연히 있습니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데스몬드 투투' 이야기가 나왔고, 선생님은 데스몬드 투투에 대해서 다들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 저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해 싸웠던 성공회 주교였다고 알려주시며 제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지 점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건 알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