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가 4일 오후 서울 중구 금남시장에서 중-성동을 정호준 후보와 함께 유세를 벌이고 있다.
이희훈
야권 '후보단일화'의 길이 사실상 막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4일 20대 총선에 쓰일 투표용지 인쇄에 돌입했다. 인쇄 후에는 단일화를 하더라도 투표 용지에 사퇴 후보자의 이름이 남아 단일화의 효과가 떨어진다. 현재 수도권에서 더민주와 국민의 당 간에 부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단일화도 힘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5일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김영환 공동선대위원장은 단일화가 되는 지역이 "아주 미미할 것"이라며 "두서너 군데가 되지 않을까"라고 전망했다.
국민의 당은 이번 총선에서 '양당 심판'을 내세웠다. 30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 당 수도권 출정식에서 안철수 공동대표는 "거대양당 기득권에 균열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고 했다. 김영환 공동선대위원장도 "후보단일화, 야권연대"의 방식은 실패해왔다며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민의 당은 당과 사전 협의 없는 후보단일화 논의에는 엄중 조치하겠다는 입장도 꺾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 중 하나로 규정한 '더민주'와의 야권연대를 거부하며 독자노선을 가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득권 양당과 무엇이 다른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안철수 대표가 보여준 입장은 이렇다. 양당의 공천 과정에서 기승을 부렸던 패권주의, 계파정치를 청산하고, 이들을 견제할 제3세력이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국면과 국민의 당 창당 과정에서의 모습을 종합해볼 때 안 대표의 구체적인 구상이 무엇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정치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발표할 기회를 거절하거나 놓쳤다. 제3세력의 안착에 중요한 요소인 선거제도 개혁이 여야간 협상의 대상이 되었을 때도 미지근한 자세를 보였다.
우선 계파정치, 패권주의 청산부터 보자.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내 내분을 잠재우기 위한 혁신안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문재인 대표는 안철수 의원에게 혁신위원장 자리와 인재영입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안 의원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계파패권주의 청산의 로드맵을 제시할 기회였다. 또한 현역 '기득권'을 대체할 만한 참신한 인재영입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 의원은 모두 고사했다. 자신이 구상하는 시스템과 염두에 두었던 인물을 제안할 수 있는 전장을 마다한 것이다. 당시 언론들이 안 의원을 '싸움을 피하는 장수'로 표현한 이유다.
물론 안 의원이 고사한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당내 친노패권세력들이 일단 안 의원에게 직을 맡겨본 뒤, 혁신안 작업에서 트집을 잡아 공격할 것을 염두에 둔 결정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표의 제안을 '트로이의 목마'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혁신위원장, 인재영입위원장 직을 맡아 자신의 구상을 보여줄 기회는 될 수 있었다. 탈당을 해도 제대로 싸워본 뒤 탈당했더라면 ,국민들이 계파정치 해결에 대한 해법을 내놓은 안 의원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계파정치 해결이라는 명분에 힘이 실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창당후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의 당의 모습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의원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교섭단체 구성에 집착한 나머지 부적격 인물을 입당시켰다는 비판도 있었다. '기득권' 청산이라는 구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공천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철수 대표 측근들 다수가 비례대표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안 대표가 갖고 있는 정치 개혁의 청사진이 이런 것이었냐는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 당이 선거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정치가 먼저다'라는 구호가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두번 째로 선거 제도 개혁을 보자. 한국 정치에서 제3정당이 존속하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소선거구제 상대다수대표제다. 선거구마다 한명만을 뽑는 제도에서는 방대한 물적, 인적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거대 양당들이 유리하다. 선거때마다 양당이 득표율보다 의석수를 많이 가져갈 수 있는 이유다. 이 제도적 압력 하에서 나타난 것이 양당제다. 국민의 당을 성공적으로 국회에 안착시키려는 안 대표의 목표는 양당제를 고착화시키는 기존의 선거 제도 변화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제는 안철수 대표의 입장이다. 안 대표는 줄곧 중대선거구제로 선거제도를 개편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제안이 실질적으로 양당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중대선거구제는 말그대로 '중대'선거구제다. 선거구가 배로 커진다. 커버해야 할 지역이 많아진다는 점은 양대 정당들에게 유리하다. 선거구당 2~3명의 당선자가 나온다는 점은 소수 정당들에게 장점이다. 하지만 이 장점도 희석되기 쉽다. '과다대표'의 문제가 중대선거구제에서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 거대 양당들은 높은 확률로 의석을 점한다. 제3당은 상대적으로 의석을 점할 확률이 떨어진다. 안 대표가 국민의 당의 안착을 위해 내놓은 중대선거구제 제안이 과연 효과적인 방안인지 의문이 드는 이유다. 중대선거구제 개편에 양대 정당들이 동의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현실적인 문제다. 기존 제도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안철수 대표가 선거 제도 개편에 적극적으로 다가섰어야 하는 시점은 작년 선거구 획정 협상국면이다. 당시 소선거구제의 고질적 문제인 득표율과 의석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이 나왔다. 비례대표를 늘리는 방안부터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나왔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몽니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제는 이 협상 국면에서 안 대표의 입장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양당 지도부끼리 이루어진 협상에서 무슨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득표율과 의석수 불일치 해소를 위한 제도의 도입은 정치개혁을 모토로 삼은 안 대표가 적극 나서야 하는 분야다. 현실적으로도 그렇다. 최소한 협상 테이블에는 올라온 방안이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이 협상 기간 동안 의미있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후에도 '중대선거구제'만 주장했다. 전장을 또 외면한 것이다.
안철수 대표가 주장하는 새정치는 지금으로선 오리무중이다. 내용이 없거나 현실성이 부족하다. 국민의 당이 세를 불리면 기존 정치권이 긴장할 것이라는 '메기 효과'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지속가능 여부는 불확실하다. 기존 정치에 대항하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탈당과 창당의 명분은 사라진다. 대신 양당제라는 압력에 곧바로 노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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