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뇰의 스튜디오>, 앙리 팡탱 라투르, 1870년, 오르세 미술관.
가운데 작업 중인 화가 마네, 그를 둘러싼 르누아르, 에밀 졸라, 바지유 등이 보인다.
김윤주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법률가이자 고위직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와 외교관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들이 당연히 자신의 뒤를 이어 법관이 되리라 믿었던 아버지는 화가를 꿈꾸는 장남에게 차선책으로 해군 장교를 권한다. 학구적이지도 않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던 마네는 그나마 입학시험을 두 차례나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6개월간의 견습 항해를 떠나게 된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한 이 항해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열여섯 살의 마네에게 화가의 꿈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고 만다. 선원으로서 경험해야 했던 '바다와 하늘뿐인 늘 똑같은 따분한' 생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몰입한 드로잉과 수채화 작업,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이국적인 풍광은 이후 그의 화가로서의 삶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풍경화를 잘 그리지 않은 그가 유독 이 시기 기억을 바탕으로 한 풍경화들을 남긴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마네가 살았던 시기는 파리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그가 태어난 1832년은 빅토르 위고가 대작 <레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삼은, 실패로 끝나버리는 6월 학생봉기가 있었던 바로 그해이다. 1848년 2월 혁명과 1851년 쿠데타, 1852년 제2제정 선포와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 근대적 자본주의와 식민지 팽창,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등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제2제정기 파리는 오스망의 대대적인 도시개발 사업으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깨끗이 들어내고 새롭게 닦은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 그 도시의 새로운 주인인 근대 부르주아 계층의 교양 있는 문화생활, 그들의 교양 속에 숨겨진 위선과 가식, 도심에서 밀려난 피곤한 서민의 고독하고 남루한 일상 따위를 화폭에 그려낸 최초의 화가. 그가 바로 마네이다.
마네가 평생 들어야 했던 비난은 그림의 소재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점, 그림 속에 묘사된 장면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다 만 것 마냥, 혹은 덜 배운 어린애가 제대로 흉내를 못 낸 것 마냥 색감과 기교가 어설프다는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역사 속 인물이나 신화 속 장면 등을 통해 감동과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 회화의 마땅한 책무인데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었다. 정성을 다해 그리고 칠하고 덧입혀 마무리를 해도 모자랄 것을 그리다 만 것 마냥, 칠하다 만 것 마냥 표면도 거칠고 선도 무디고 색감의 배치와 대조도 영 낯설기만 한 그림들뿐이었으니 딱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