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백화점(왼쪽 사진)이 들어간 일제강점기의 엽서. 이 자리에 지금은 종로타워가 들어서 있다.
부산근대역사관
그 별천지의 건물,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사람은 박길룡이었다. 늘 '최초'와 '유일'을 달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아래 경성공전) 건축과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 조선총독부에서 최초로 건축기수가 된 조선인. 조선인은 승진해봤자 기수까지였던 총독부에서 최고기술자인 기사에 오른 최초의 조선인.
일제강점기에 건축사무소를 최초로 개업한 조선인도 그였다. 그의 이름을 딴 '박길룡건축사무소'였다. 사업은 번창했다. 주택만 해도 하루에 한 채씩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종로 앞길에서도 뒷길에서도 그가 설계한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더 있다. 1938년 그는 '조선건축회'의 이사가 되었다. 역시 조선인 최초였고 유일했다. 1941년엔 경기 건축대서사(오늘날 건축사와 유사) 조합장이 되었다. 같은 해 '조선건축기사협회'에서도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면서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그는 46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건축회'는 건축전문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5월호에 박길룡 특집 기사를 냈다. 그의 작품과 경력을 소개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추모와 애도의 글을 실었다. 일본인 건축가는 그를 "반도 출신의 건축가로서 유일무이의 고봉"이라고 평가했다.
승승장구의 역사이고 화려한 이력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고단한 성장기가 있었다. 내면에는 식민지 지식인의 모순과 이중성이 교차하고 있었다.
화신백화점 설계자 '흙수저' 박길룡박길룡은 요즘 말로 흙수저였다. 그는 1898년 영세한 미곡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너무 가난해서 열 살 때부터 쌀 배달, 물장수, 담배쌈지 깁기, 단춧구멍 뚫기, 행상을 하며 고학을 했다. 그가 나고 자란 종로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그 종로였다.
일본 상권이 아무리 설쳐대도 넘볼 수 없던 민족 자존심의 종로였다. 종로, 장남, 고학은 그에게 성실함, 의협심, 결단력, 보스 기질의 바탕이 되었다. 그 덕에 들어갈 때도 차별, 나갈 때도 차별이라던 경성공전에서 그는 재학 시설 내내 일본인을 제치고 급장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싸우며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때, 3. 1운동이 일어났다. 경성공전의 조선인 학생 30여 명 중에서 20명이 독립만세 시위에 나갔고 13명이 판결을 받았다. 건축과 후배 박동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2년 집행유예를 받은 후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평소 의협심이 강하고 보스 기질이라던 박길룡은?
다른 건축가들보다 더 유명해서 더 많은 자료와 증언이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그의 처지를 상상해본다. 졸업을 코앞에 둔 상태에 아래로 4명의 동생들이 있다, 이미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더구나 이제 겨우 막 인생의 한 고비를 넘으려는 순간이다... 어쨌든 그는 3. 1운동 직후인 3월 25일 경성공전을 졸업했고, 이듬해에 조선총독부 설계조직에 들어갔다.
그는 총독부에서 12년 동안 건축기수로 근무했다. 기수는 하급관리였다. 위로 사무관과 기사가 있었고 아래로 촉탁이나 고원이 있었다. 사무관은 행정관료였고, 기사는 건축 실무 전반의 책임자였다. 그 기사를 박길룡이 조선인 최초로 했다지만,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전 후신) 교수였던 이균상은 좀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조선인 기사는 없었단다. 박길룡이 받은 기사는 퇴직을 앞둔 사람을 대우하는 참기사였단다. 실제로 박길룡은 기사가 된 지 이틀 만에 퇴직했고 두 달 후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것도 총독부 안과 밖에서, 건축 안과 밖에서, 다방면으로, 맹렬하게 그러나 모순적으로.
그는 낮에는 총독부에서 건축 일을 하고, 밤에는 조선인 건축주가 의뢰한 주택과 사무소를 설계했다. 마침 회사령 폐지 이후 조선인 자본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부업으로 쌓은 경험과 명성 덕에 드디어 1932년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건축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1926년부터 신문, 잡지, 건축전문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지역별 재래식 주택개량 방안, 부엌과 온돌 개량 등 건축계몽에 관한 글이 많았다.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개업할 즈음엔 조선인 건축가들과 '조선가옥건축연구회'를 설립하고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