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안채동측 굴뚝사당으로 나가는 문 바로 앞에 있다. 안채 기준으로 동측외벽에 붙어 있다. 손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이나 운조루 굴뚝이 담고 있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김정봉
'삼대삼미(三大三美)', 구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삼대'는 지리산, 섬진강, 구례들판을, '삼미'는 수려한 경관, 풍족한 곡식, 넉넉한 인심을 말한다. <택리지>에서도 '볍씨 한 말을 뿌려 예순 말을 거두는 곳이 기름진 땅인데 같은 양을 뿌려 140말을 수확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전라도 남원과 구례, 경상도 성주와 진주'라면서 구례를 가장 살기 좋은 땅 중에 하나로 꼽았다.
삼미로도 모자라 '오미'(五美)를 자랑하는 마을이 있다. 토지면 오미리다. 원래 이름은 오동(五洞)이었다. 1776년, 류이주(1726~1797)가 오미마을에 운조루를 짓고 들어오면서 오미리라고 했다. 현재 세 마을이 있다. 1500년경에 형성된 내죽(內竹)마을이 가장 오래됐고 하죽(下竹)과 오미마을이 영조이후에 이룬 마을이다.
'금환락지(金環落地) 러시'오미리에는 수백 년 전부터 '금환락지의 전설'이 떠돌았다. 선녀가 구름위에서 금가락지를 잃어버렸는데 그 반지가 묻힌 곳에 살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 토지면 오미리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토지면(土旨面)은 화엄사에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토지처(土旨處)였다는데 항간에 금가락지를 토한 곳이라고 해 토지(吐指)라 불렸다는 그럴듯한 얘기도 나돌았다.
이런 전설을 안고 오미리에는 역사적으로 '금환락지 러시'가 몇 번 있었다. 러시(rush)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골드러시'에 맞춰 붙여본 말이다. 1차 러시는 영조시대로 하죽마을과 오미마을 형성과 관련이 깊다. 영조 때 경주 이씨 이기명이 경주 최씨와 함께 금환락지 전설을 좇아 정착한 곳이 하죽마을이고, 류이주가 일가와 함께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를 찾아 머물러 산 곳이 오미마을이라는 것이다.
오미리에는 금환락지 전설과 함께 위에서 아래로 3개의 명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떠돌아다녔다.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金龜沒泥)가 맨 위 명당이고 중간이 금환락지(金環落地), 다섯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인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아래 명당이라는 것.
운조루를 지을 때, 애 머리만한 돌거북이 나온 사실을 근거로 금구몰니터는 이미 운조루가 차지한 것으로 믿고 나머지 금환락지를 찾아 이주해온 사람들로 1900년대 초 오미리 인구가 다시 급증했다. 2차 러시다. 운조루 앞 환동에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한 박부잣집(현 곡전재)이 그 중 하나다. 금환락지처럼 보이기 위한 것인지,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주변에 대숲을 만들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