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 해발 1200미터의 다른 모습해발 1200미터에 위치한 루산 정상부에는 다섯개의 큰 호수와 별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망강정에 바라본 산은 웅장한 산세를 자랑한다. 그러니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을 사랑했다
조창완
특히 루산은 문인의 산이자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깊은 정치적 여정이 된 곳이다. 루산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바로 그 산이다. '물줄기 날아 내려 길이 삼천 자이니,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 것 같네'(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는 시구로 널리 알려졌지만 시 곳곳이 루산이 가진 인문적 깊이를 말해준다.
루산은 이백 뿐만 아니라 백거이, 소동파 등 수많은 문인이 시를 남겼고,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배경도 루산으로 알려졌다. 철학자 주돈이(周敦颐)나 주희(朱熹), 캉요웨이, 후스, 궈모루가 이곳을 배경으로 생각을 키웠고, 동진화가 고개지(顾恺之)의 '루산도'(庐山图) 등 수많은 그림 작품의 배경이 됐다. 난창이 팔대산인의 중심지이고, 인근 징더전이 중국 도자기의 중심도시가 된 것도 루산이라는 배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루산은 중국 중원에 있는 최고의 피서지이기도 하다. 북위 29°26~29°41에 위치해 여름이 길고 덥지만 루산의 해발 1200미터에는 구링지에(牯岭街)라는 면 단위 정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또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포양호(鄱阳湖)가 동쪽에 있고, 북쪽으로는 창지앙이 흘러가니 비가 많고, 안개가 많아 고산지역은 더위를 느낄 겨를이 별로 없다.
당대 이곳의 가치를 먼저 활용한 사람은 서양의 부동산업자였다. 1895년부터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20여 개국 부동산업자들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분양했다. 가장 많은 시기에는 4000여 채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1800여 채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대에 제일 먼저 루산에 빠진 이는 장쩨스다. 그는 루산을 특히 좋아했는데, 쑹메이링과 함께 이곳에서 여름을 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서안사변의 다음해인 1937년 여름 저우언라이는 이곳을 찾아 장쩨스와 2차 국공합작을 논의해야 하기도 했다.
장쩨스 못지 않게 마오쩌둥 역시 루산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루산은 중국 당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곡점을 찍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 첫 회의는 1959년 7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8기8중전회'(八届八中全会)다.
당시는 공산화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온 삼반운동이나 대약진운동으로 4000만 명이 굶어죽을 만큼 폐해가 심각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동향인으로 혁명동지이자,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총사령관을 지낸 펑더화이(彭德怀)가 대약진운동의 폐해와 더불어 개인숭배 흐름을 충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전쟁에서 아들 마오안잉을 잃어 사감이 있던 마오쩌둥은 그 편지를 공개하고, 토론에 부쳐 펑더화이를 자리에서 끓어내렸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자 국방부장이었던 펑더화이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1974년 11월 쓸쓸이 숨을 거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