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정치인 모두의 사랑을 받은 '루산'

십여 년만에 찾은 난창 '상전벽해'... 루산, 바이루동서원은 옛모습 그대로

등록 2016.06.01 17:06수정 2016.06.0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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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난창의 야경 간지앙을 기존으로 동쪽은 텅왕거와 어우러진 옛 도시라면, 맞은 편 홍구 지역은 거대한 신도시로 변모햇다

난창의 야경 간지앙을 기존으로 동쪽은 텅왕거와 어우러진 옛 도시라면, 맞은 편 홍구 지역은 거대한 신도시로 변모햇다 ⓒ 조창완


1999년 중국으로 건너가 처음 찾은 도시 가운데 하나가 지앙시성 난창(南昌)이다. 가장 만나고 싶던 대장정의 시작점들인 루이진(瑞金)과 징강산(井崗山)이 지앙시에 있기 때문이다. 이후 2002년 중국 철학기행을 떠났다가 다시 난창을 방문했는데, 십수년이 넘어 얼마전 난창을 찾았다. 이번에 만난 난창은 내 기억속에 난창이 아니었다.

십수년 전 만났던 난창은 중국 혁명 성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27년 8월 1일 발생한 난창봉기는 사실상 중국 공산당이 태어나는 데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다. 주더, 저우언라이, 허롱, 류보청 등이 주도하던 난창 봉기군들이 쫓겨서 징강산으로 들어가고, 이곳에서 마오쩌둥을 만나면서 중국 군대가 태동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이날인 8월 1일을 창군 기념일로 잡을 정도다.


당시 난창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간지앙(赣江) 변에 있는 중국 3대 누각중 하나로 불리는 텅왕거(滕王阁)와 난창봉기를 기념하는 팔일기념관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난창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우선 텅왕거 주변 구시가도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섰지만 더 놀라운 것은 강의 맞은 편인 홍구(紅谷) 지역이었다. 고속열차역인 난창서역에서 강을 따라 10여 킬로 넘게 신도시가 들어서 있었다. 2011년 중국도시체육대회를 통해 구축된 운동장과 컨벤션을 위한 국제컨벤션센터가 웅장하게 지어져 있었다. 거기에 우리가 난창을 떠난 직후인 5월 28일에는 중국 최대 부호인 완다그룹이 30억 위안(한화 5400억 원 가량)을 투자한 완다파크도 개장해 난창의 랜드마크로 자리할 준비를 했다.

초청 측의 배려로 나는 처음 간지앙 유람선을 타봤다. 텅왕거 옆 선착장에서 출발한 배가 강의 중심부에 들어섰을 때 양쪽 건물 등을 배경으로 레이저쇼가 펼쳐졌다. 기네스에 오를 정도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수백의 대형 건물과 간지앙을 가로지르는 다리, 110미터까지 치솟는 분수, 높이 160미터의 등이 어울어져 펼쳐지는 레이저쇼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았다. 홍콩 빅토리아만에서 펼쳐지는 조명은 이곳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a 난창의 랜드마크인 텅왕거의 낮과 밤 중국 3대 누각(황학루, 악양루, 등왕각) 중 하나로 꼽히는 텅왕거의 모습. 웅장한 규모는 세상을 내려볼만 하다

난창의 랜드마크인 텅왕거의 낮과 밤 중국 3대 누각(황학루, 악양루, 등왕각) 중 하나로 꼽히는 텅왕거의 모습. 웅장한 규모는 세상을 내려볼만 하다 ⓒ 조창완


텅왕거는 다시 낮시간에도 찾았다. 당 고조(高祖) 이연(李渊)의 아들인 등왕 이원영(李元嬰)이 653년에 처음 건립한 텅왕거는 지진과 전화로 수차례 파괴되었다가 지금 있는 시설은 시멘트로 만들어졌고, 내부에 2대의 엘리베이터까지 있어, 옛 맛이 없다. 그러나 중국 최고의 사륙변려문으로 알려진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등 수많은 명문을 담고 있는 만큼 그 가치를 절하시킬 수는 없다.

지앙시는 혁명의 도시이자, 명산의 도시이기도 하다. 중국 산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관련시가 있는 루산(廬山)을 비롯해 혁명성지 징강산, 도교 명산 산칭산(三淸山)과 롱후산(龙虎山) 등이 지앙시에 있다.


a 루산 해발 1200미터의 다른 모습 해발 1200미터에 위치한 루산 정상부에는 다섯개의 큰 호수와 별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망강정에 바라본 산은 웅장한 산세를 자랑한다. 그러니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을 사랑했다

루산 해발 1200미터의 다른 모습 해발 1200미터에 위치한 루산 정상부에는 다섯개의 큰 호수와 별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망강정에 바라본 산은 웅장한 산세를 자랑한다. 그러니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을 사랑했다 ⓒ 조창완


특히 루산은 문인의 산이자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깊은 정치적 여정이 된 곳이다. 루산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바로 그 산이다. '물줄기 날아 내려 길이 삼천 자이니,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 것 같네'(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는 시구로 널리 알려졌지만 시 곳곳이 루산이 가진 인문적 깊이를 말해준다.

루산은 이백 뿐만 아니라 백거이, 소동파 등 수많은 문인이 시를 남겼고,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배경도 루산으로 알려졌다. 철학자 주돈이(周敦颐)나 주희(朱熹), 캉요웨이, 후스, 궈모루가 이곳을 배경으로 생각을 키웠고, 동진화가 고개지(顾恺之)의 '루산도'(庐山图) 등 수많은 그림 작품의 배경이 됐다. 난창이 팔대산인의 중심지이고, 인근 징더전이 중국 도자기의 중심도시가 된 것도 루산이라는 배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루산은 중국 중원에 있는 최고의 피서지이기도 하다. 북위 29°26~29°41에 위치해 여름이 길고 덥지만 루산의 해발 1200미터에는 구링지에(牯岭街)라는 면 단위 정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또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포양호(鄱阳湖)가 동쪽에 있고, 북쪽으로는 창지앙이 흘러가니 비가 많고, 안개가 많아 고산지역은 더위를 느낄 겨를이 별로 없다.

당대 이곳의 가치를 먼저 활용한 사람은 서양의 부동산업자였다. 1895년부터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20여 개국 부동산업자들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분양했다. 가장 많은 시기에는 4000여 채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1800여 채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대에 제일 먼저 루산에 빠진 이는 장쩨스다. 그는 루산을 특히 좋아했는데, 쑹메이링과 함께 이곳에서 여름을 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서안사변의 다음해인 1937년 여름 저우언라이는 이곳을 찾아 장쩨스와 2차 국공합작을 논의해야 하기도 했다.

장쩨스 못지 않게 마오쩌둥 역시 루산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루산은 중국 당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곡점을 찍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 첫 회의는 1959년 7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8기8중전회'(八届八中全会)다.

당시는 공산화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온 삼반운동이나 대약진운동으로 4000만 명이 굶어죽을 만큼 폐해가 심각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동향인으로 혁명동지이자,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총사령관을 지낸 펑더화이(彭德怀)가 대약진운동의 폐해와 더불어 개인숭배 흐름을 충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전쟁에서 아들 마오안잉을 잃어 사감이 있던 마오쩌둥은 그 편지를 공개하고, 토론에 부쳐 펑더화이를 자리에서 끓어내렸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자 국방부장이었던 펑더화이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1974년 11월 쓸쓸이 숨을 거둬야 했다.

a 루산회의지. 중국 당대 정치의 가장 격렬한 현장 루산 정상부에 자리한 회의지는 1959년과 1970년 가장 극적인 중국 정치사의 흐름에 있다.

루산회의지. 중국 당대 정치의 가장 격렬한 현장 루산 정상부에 자리한 회의지는 1959년과 1970년 가장 극적인 중국 정치사의 흐름에 있다. ⓒ 조창완


1959년보다 주목은 받지 못하지만 1970년 다시 루산에서 열린 '9기 이중전회'(九届二中全会)도 중국 당대정치에서 큼 함의가 있다. 문화대혁명 전반기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후계자로 린뱌오를 점찍어 두었다. '89 천안문 사건'에 관여했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중국사를 가르치는 왕단은 그 이유를 '자신보다는 약간 부족한 사람을 선호'하는 마오쩌둥의 생각 때문이었다고 보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린뱌오나 화궈펑이다.

그런데 1970년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갈라서게 된 것이다. 그해 3월부터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하려고 했다. 더욱이 루산회의에서 천보다 등이 국가주석직 신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대부분의 참석자가 찬성하는 것을 보고 마오쩌둥은 린뱌오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눈밖에 난 린뱌오는 1971년 9월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몽골로 망명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루산회의 터는 십 년 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일층에는 루산회의 전반을 담은 전시관이 있고, 위층 회의에는 1차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의 명패가 놓은 대회의실이 있다. 마오쩌둥의 첨필로 인해 어지럽혀진 펑더화이의 편지는 당시 펑의 운명을 짐작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주석'(主席)으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 펑은 민초들의 괴로움을 담았지만, 그것을 받은 마오쩌둥은 목숨을 걸고 혁명할 때의 동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산 정산부를 둘러싼 안개와 간간히 내리는 비로 루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찌뿌둥한 날씨는 마오의 마음을 은유해 그것이야 말로 루산진면목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루산에 가면서 장자지에나 황산 같은 기경을 기대하면 안된다. 루산은 기암괴석의 산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장 잘 맞추어진 편안한 산이기 때문이다. 강이 가장 편리하고, 보편적인 교통수단이던 시기에 창지앙에 맞붙은 루산이 명산이 된 것이다.

a 송대 4대 서원 중 하나인 바이루동서원 송대 4대 서원(악록, 백록동, 숭양, 응천) 중 하나인 바이루동 서원은 루산 우라오펑 아래 자리해 천하의 인재를 길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원의 입구와 주자가 심었다는 붉은 계수나무 두그루(오른쪽)

송대 4대 서원 중 하나인 바이루동서원 송대 4대 서원(악록, 백록동, 숭양, 응천) 중 하나인 바이루동 서원은 루산 우라오펑 아래 자리해 천하의 인재를 길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원의 입구와 주자가 심었다는 붉은 계수나무 두그루(오른쪽) ⓒ 조창완


루산이 끼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보물은 바이루동서원(白鹿洞書院)이다. 정상에서 수백 번이나 굽어돌아나는 도로를 따라 다시 평지로 내려와 산의 동쪽 방향으로 가면 바이루동서원이 있다. 여산 우라오펑(五老峯)의 웅장한 산 아래에 자리한 바이루동서원이 만들어진 것은 당 정원(唐贞元) 시기 낙양사람 이발(李渤)과 형제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부터다.

이발은 흰 사슴 한 마리를 키웠는데, 그래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이곳에 이름을 가장 드높인 사람은 주희(朱熹, 1130~1200)다. 주희는 1178년 남강군(南康军)의 지사로 발령받은 후 낡아진 백록동서원을 수리하고 스스로 동주(洞主)가 되었다. 주희로 인해 명성이 높아지자 육상산(陆象山) 등 당대 지성들이 이곳에 와서 강의하고 학문을 교류했다. 이로 인해 이 서원은 송대 4대서원 중에 하나가 됐다.( 长沙 岳麓书院, 商丘 应天书院, 登封 嵩阳书院 등)

십여 년만에 찾은 바이루동서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만큼 낡아져서 더 초라한 모습이었다. 서원에 들어가면 주희가 심었다는 붉은 계수나무(丹桂) 두 그루가 손님을 맞는다. 10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붉은 계수나무가 아마 가장 반가운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일 것이다. 주자를 가장 잘 모신 이가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안내판에도 한글이 모두 병기되어 있어 그런 분위기를 실감케 했다.

바이루동서원에서 주자가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주자는 오경중심의 유학을 사경중심으로 바꾼 중국 철학사의 거인 중 하나다. 환갑을 전후로 정파 싸움에서 밀려난 주자는 거짓학문(僞學)으로 비판받았다. 그의 제자들 역시 그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었다.

이런 그의 역사에서 바이루동서원은 가장 중요한 위치였고, 학문적으로 가장 왕성하던 시기였다. 주자의 학문적 성취는 지금도 빛이 바래지 않아, 서원의 중심부에 있는 장원교(壯元橋)는 중국 대학시험철이 되면 방문객들로 넘친다고 한다. 서원의 뒤편에 있는 백록원에는 십여 마리의 백록들이 놀고 있었다. 이발이 키우던 백록의 후손인지 모르지만, 중국에서 흰 생물은 신비한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에 잘 보존한다.

10년만에 만난 장시 난창과 루산의 두 얼굴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난창은 상전벽해를 실감하게 하는 거대한 변화 속에 있다면 루산의 정상부나 바이루동서원은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발전 속도의 중간을 채우는 것이 무엇일지가 궁금했다. 결국 지방정부가 과도한 부채를 통해 만들어놓은 도시의 거품이 빠졌을 때, 어떤 상황에 빠질 것인가? 또 향후 중국의 발전에 있어 초반기 중국 혁명 지도자들의 초발심과 중간의 혼란들이 중국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하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지앙시에서 맡는 혁명의 기운들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나름대로 다양한 흥미를 준다.
덧붙이는 글 관련 내용은 국민라디오 민동기 뉴스바에서 매주 화요일 방송하는 '달콤한 중국' 5월 31일(화) 방송에서도 이야기 됐습니다
#지앙시 #난창 #루산 #백록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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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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