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돈으로 사람을 사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게 하는 일은 잔인하다.
참여사회
물론 탈북자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몸은 떠나 왔어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며 배운 애국의 방식에 대한 생각만은 버리지 않았기에 그랬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자신들의 조국은 이제 남한이고, 정부를 불신한다거나 그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애국 행위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종북세력 척결'을 입에 달고 다니는 우리 보수 및 극우 세력이 외치는 애국이 바로 이런 북한식 애국하고 똑같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식의 애국주의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지닌 민족주의적 또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다. 이것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과거의 공통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겠지만, 사실은 일제가 발전시킨 애국주의의 거울상 같은 애국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애국주의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유사한 애국주의는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되지만, 일제는 이른바 '황도유학'을 통해 그 애국주의를 (엉터리지만) 유교적으로 정당화했다. 곧 자신을 낳고 기른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듯이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말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했던 박정희의 유신이 '충·효'를 함께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였다. 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 이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애국주의는 너무도 역설적인 일제의 잔재다.
문제는 이런 애국주의가 아직도 강고하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어버이연합 활동을 하는 노인들이나 탈북자들만이 아니다. 최근 불거진 아이돌 스타들의 역사의식 논란은 청년 세대의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편향을 잘 보여준다. 단순히 보수 세력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배외주의적 공격에서 보듯이,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 역시 자주 민족과 국익을 앞세우며 이성을 잃곤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몇몇 개인이나 단체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일제의 영향에 뿌리를 둔, 깊은 병의 하나라고 보고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
민주적 애국주의라는 치료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은 도덕적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치유책이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는 국가가 무턱대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가치 실체가 아니며 우리와 다른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다른 먼 나라의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연대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우리 사회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문화의 일부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의 한계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이 지닌 불가침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도덕적 개인주의는 근본적으로 옳지만,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만이 그런 가치를 지켜줄 수 있다. 국가 단위의 정치공동체가 무조건 개인보다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가치 실체는 아니지만, 개인이 많은 권리들을 누리고 삶을 위한 물질적 기반을 확보하며 자기실현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 사람들은 아무 매개 없이 쉽게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방인들과 정서적 일체감 같은 것을 형성할 수 없다. 보편적 인권과 평등한 자유의 원칙 위에서 조직된 민주공화국 시민들의 연대라는 기반 위에서만 세계 시민의 연대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애국주의는 깊은 사회적 병이다. 그러나 치료제는 그에 대한 단순한 경멸이나 부정이 아니다. 국가를 그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약이라고만 여기거나 사라져야 할 악이라고 보는 태도도 아니다.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참된 조건이다. 민주공화국의 헌정적 원리와 가치와 제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 곧 '헌법애국주의' 또는 '민주적 애국주의'가 그 병에 대한 참된 치료제다.
애국주의가 병리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그것을 보수의 전유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보 세력이야말로 참된 애국 세력임을 정치적으로 자명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진보의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은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민주공화국답게 만들려는 노력과 분투, 곧 헌법애국주의적 실천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진보는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고, 애국주의라는 사회적 병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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