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심재 사랑채경사진 곳에 들어선 몽심재, 6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팔각기둥과 누마루에 난간을 돌린 솜씨는 볼만하다.
김정봉
마을 어귀에 죽산박씨 '남원시대'를 연 박자량 사적비가 빛난다. 사적비 뒤로 실개천이 휘돌고 마을 깊숙이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가, 두어 채 기와집이 잇닿아 있다. 그 가운데 몽심재는 마을의 자랑거리다. 1700년대 후반, 박문수 16대손 박동식(1753-1830)이 지었다. 몽심재 이름은 박문수 시에서 '몽(夢)'과 '심(心)'을 따온 것이다.
격동류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마을을 등지고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며 잠자고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 산에 올라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둔한 박문수는 '도연명'을 꿈꾸고 '백이(숙제)의 마음'을 가지려했다. 박동식은 몽심재를 짓고 박문수의 뜻(夢과 心)을 영원히 기리고 전하고자 했다. 어쩌면 이 꿈(夢)은 대의(大義)요, 마음(心)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실천의지인지 모른다. 후손 중에 대의를 좇아 의(義)를 행한 후손들이 많은 점은 우연이 아니다.
초곡 박계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남원 율치에서 전사하였고 몽심대 2대주인 송곡 박주현(1844-1910)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애통해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몽심재 3대주인 정와 박해창(1876-1933)은 소작인에게 선행을 베풀고 1923년, 마을 인근에 초등학교를 건립하기도 했다.
몽심재의 적선(積善)뭐니 뭐니 해도 몽심재 근본 꿈(夢)은 가문의 영원한 번성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죽산박씨가 기본적으로 가지려 한 마음씨(心)는 '적선(積善)철학'이었다.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집안에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른다는 뜻)을 들먹이지 않아도 적선이야말로 가문이 영원히 번영하는 데 필수조건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