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에서 만난 오헨로상일본 시고쿠섬의 순례자 복장을 하고 걷는 순례자
정효정
둘이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는 이미 한 달여를 걸은 숙련자였고 나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초보였다. 걷는 속도가 비교가 안 된다. 그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도 닌자처럼 가볍게 움직였고, 난 이제 막 잡기 시작한 등산 스틱조차 적응이 안 되던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숙소에서 보자며 먼저 떠났고 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늘 그런 식이었다. 배낭을 메고 하루 20~30km를 걷는 것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아침부터 걷기 시작해 오후 1~2시면 숙소에 도착했지만, 같은 시간에 출발한 내가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4~5시였다. 멋진 남자를 만나기는 커녕, 파김치가 되어 걷다보면 오후쯤에는 얼굴을 익힌 할머니들이 다가와 '기운내라'며 인사를 하곤 했다. 물론 다들 착하고 멋진 할머니들이긴 했지만, 내심 제대로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쥬비리(zubiri)로 향하는 날, 가늘게 비가 왔다. 카페콘레체라고 불리는 우유를 넣은 커피를 하나 사서 등산용 컵에 넣고 빗속에서 마시면서 걸었다. 아직 새벽, 숲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두워서 혼자 가긴 좀 무섭다. 누가 오길 기다리는데 오리손 산장에서 만난 리타가 왔다. 60대인 그녀는 유방암 4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서둘러 이곳에 왔노라고 한다. 실제로 큰 병을 앓은 후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많았다. 미국에서 온 마크 역시 뇌졸중을 극복하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