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내팽개친' 아내가 불편하다고?

[싸우는 여성들의 사회②] '수혜자'인 남성에게 불편한 영화 <서프러제트>를 권한다

등록 2016.07.03 20:07수정 2016.07.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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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엔 영화 <서프러제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김예지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있고 나서다. 한 남성과 이 사건을 두고 언쟁을 했다. 그는 말했다.

"대체 뭘 어쩌란 건지 모르겠어. 나더러 사과라도 하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며 그와 긴 시간 말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해당 사건을 넘어, '기울어진 젠더 지형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으로 확장됐다. 그러자, 그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이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면서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 잘 알아. 그래서 사실 여성에 대해 논의를 하기가 불편해. 나는 이걸 잃고 싶지 않거든."

<서프러제트>는 불편한 영화다. 위에 언급한 사례처럼 자신이 수혜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남성에게는 물론, 그런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남성에게는 더 불편한 영화일 것이다. 여성들이 직장과 육아, 살림마저 내팽개치고 '운동꾼(Suffragette,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 되어 상가에 돌을 던지고 건물을 폭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남성을 가해자로, 여성을 피해자로 그린 영화의 내용이 달갑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묻고 싶다. 사실 당신이 느끼는 이 불편함은 남성으로 태어나 얻은 '생득적 권력'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닌지. 그렇다면 당신은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주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한 남성의 고백 "나는 수혜자다, 이걸 잃고 싶지 않다"


영화 <서프러제트> 스틸 이미지
영화 <서프러제트> 스틸 이미지UPI 코리아

영화는 첫 번째 시퀀스부터 시위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위대는 여성의 참정권을 외치며 옷가게에 돌을 던진다. 가게는 파손되고 다음 날 신문에는 이 사건이 '폭력 시위'라 실린다.

이 첫 장면이 주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기 전, 카메라는 옷가게에 진열된 마네킹을 비춘다. 마네킹은 성인 여성과 아이들로 구성돼 있다. 성인 여성 마네킹에는 예쁜 옷이 입혀져 있고 손에는 양산이 들려있다. 마네킹의 자세는 아이들을 향해 있다.


100여 년 전, 영국 사회에서 남성이 규정한 여성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고운 옷을 입고 아이들을 돌보며 아내와 엄마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 하는 모습 말이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렇게 남성에 의해 규정된 여성의 모습을 향해 돌을 던진다.

남성이 여성의 존재를 정해주는 사회 안에서, 남성의 말은 곧 법이다. 주인공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가 여성 참정권 운동에 가담하자 남편 소니 와츠(벤 위쇼)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내 아내야. 아내답게 행동해."

여성들을 체포한 경찰은 여성들을 법적으로 처리하는 대신 "그냥 집 앞에 떨어뜨려 놔"라고 명령한다. 어차피 집에 가면 남편에게 혼날 것이니, 법적 처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는 '법 자체가 곧 남성'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집 앞에 '떨어뜨려 진' 모드 와츠에게 남편은 "당신은 엄마이자 아내야, 그게 당신의 삶이야"라며 그녀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모두들 일하지만 엄마는 아냐" "모두들 일하지만 엄마는 아냐"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엽서. 여성이 가사 노동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는 편견, 그리고 공적 영역에 진출할 경우 이 '당연한' 업무를 소홀히 할 것이라는 편견이 드러난다.
"모두들 일하지만 엄마는 아냐""모두들 일하지만 엄마는 아냐"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엽서. 여성이 가사 노동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는 편견, 그리고 공적 영역에 진출할 경우 이 '당연한' 업무를 소홀히 할 것이라는 편견이 드러난다. Dunston-Weiler Lithograph

이 영화에 나오는 남성 중 여성의 주체성과 자기 존재에 대한 결정권을 존중한 남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은 남성들과 모드를 집에서 내쫓은 소니는 물론, 아내 이디스 엘린(헬레나 본햄 카터)의 참정권 운동을 지지했던 남편도 그녀의 건강을 이유로 그녀를 감금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만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가부장적 가정을 유지해 줄 아내, 남성에게만 있었던 양육권을 위해 자녀를 길러 줄 엄마, 남성 공장장 테일러(제프 벨)가 운영하는 세탁 공장에서 온갖 성희롱과 살인적 근무 환경을 견뎌 줄 여공,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투표권 없이 그냥 남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2등 시민.

이렇게 여성은 남성이 정해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놀라우면서도 서글픈 것은, 1912년이라는 시대와 런던이라는 공간만 제거하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진짜 폭력은 누가 행사하고 있는가

영화 <서프러제트> 스틸 이미지
영화 <서프러제트> 스틸 이미지UPI 코리아

"너무 극단적이다."

여성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면 으레 들려오는 소리 중 하나다. '극단적'이라는 말에는 "듣기 좋게 좋은 말로 하라"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영화에서 스티드 경감(브렌단 글리슨)도 '폭력 시위'를 한 모드를 체포해 놓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다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요."

모드는 대답한다.

"우리가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는 건, 폭력만이 그들이 이해하는 말이기 때문이에요."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결성된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상가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다이너마이트로 건물을 폭파한다. 경찰은 이를 '폭력 시위'라 규정하고 주모자 검거와 처벌에 앞장선다.

언론도 이들의 사진을 1면에 게재해 검거에 힘을 싣는다. 남성들은 정치적 문제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보지 않고 지금 당장 눈앞에 일어난 '가시적 폭력'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여성들이 행사한 폭력으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은 오히려 경찰이었다. 선거법 개정 불발에 목소리 높여가며 분노를 표출한 여성들은 남성 경찰에 의해 그 자리에서 물리적 폭력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남성들에게 여성이 겪고 있는 현실적 고통을 이해시키는 방법은 가시적 폭력으로 그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시끄러워서라도 한 번 귀 기울일 테니 말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줄곧 '법'을 이야기한다. 스티드 경감은 자신을 "법의 수호자"라고 명명하며 여성이 경찰에게 맞는 동안 지켜보고만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여성들이 법을 어겨가며 집회를 했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그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애초에 남성만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여성에게 그 법을 지켜가며 자기 목소리를 내라는 것은 심히 모순적이다. 그 법에 의해 여성의 비명은 '폭력 시위'로 규정돼버리고 만다.

'평화를 위한 평화'를 지키라 강요받아 평화롭게 말하면 그들은 듣지 않고,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폭력을 사용해 말하면 그들은 평화롭게 말하라 다그친다. 그러는 사이, 약자인 여성의 삶에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은 '현재 진행' 중이다.

"듣기 좋게 말하라"는 요구는 결국 "그냥 순응하라"는 명령이다. 진짜 폭력은 누가 행사하고 있는가.

싸우는 여성들이 불편한 당신에게

 성정치학은 다른 말로 '인권의 정치학'이기도 하였다. 여성의 권리를 인권이란 이름으로 명명하고 여성의 문제를 '국가의 책임'으로 만들어 낸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의 포스터. 당시 정치 참여의 권리를 말하는 여성은 '반역자'(rebels)였다.
성정치학은 다른 말로 '인권의 정치학'이기도 하였다. 여성의 권리를 인권이란 이름으로 명명하고 여성의 문제를 '국가의 책임'으로 만들어 낸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의 포스터. 당시 정치 참여의 권리를 말하는 여성은 '반역자'(rebels)였다. UPI 코리아

마지막 시퀀스에서 모드는 '꿈'이라는 책을 읽는다. 여성사회정치동맹원들이 돌려 읽었던 책이다. 모드는 다음의 구절을 묵독한다.

"이성이 말한다. 우리는 노동의 강둑을 지나 고통의 물살을 건너야만 한다고.
이성이 묻는다. 침묵 속에 무엇이 들리는가. 발소리. 수백 명, 수천 명의 발소리."

누군가의 눈에는 싸우는 여성들의 모습이 굉장히 감정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떼로 운집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이 '소란'은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이성의 산물'이라고. 단순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아무 행동이나 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통해 행하는 '운동'이라고. 참정권, 나아가서는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하는 당연한 요구라고.

가부장적 사회의 보호 안에서 태어날 때부터 강자의 권력을 획득해 편하게 살아온 남성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많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젠더 권력을 누리며 불편함 없이 살아온 당신이 이 영화가 주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기를 바란다.

모드의 말을 빌려, 여성은 "당신보다 잘 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존재다. 이 존재가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억압에 시달려 온 100년의 세월을 능히 감당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도 생득적으로 지니게 된 '억압자'라는 위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서프러제트 #페미니즘 #영화 #여성 #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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