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야구팀과 함께1926년 6월 15일, 여운형 선생이 코치로 있던 상하이 야구팀과 함께 찍은 사진. 선생은 기독교청년회 운동부장 시절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경기를 다녀왔고, 중국 금릉대학에서는 야구 대표 선수로 뽑혀 등록금을 면제받기도 했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선생이 체육계에서 처음 두각을 드러낸 종목은 '야구'였는데, 실제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가 도입되던 시기부터 선생은 야구계에서 중심적 활약을 한 바 있다.
우리나라 야구는 황성 YMCA의 초대 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는데, 당시 YMCA 운동부 주장으로 있던 이가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은 1912년 11월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에 나서 일본 야구 명문인 와세다 대학팀과 친선경기를 하기도 했다. 이를 모티브로 한 영화가 바로 2002년 개봉한 영화 <YMCA 야구단>. 영화 속 이호창(송강호 분)의 실제 모델이 선생이었던 셈이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동포들의 체육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상해한인체육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맡았으며, 푸단대학교 명예교수로 체육부를 담당하여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순방하기도 했다.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수감되었다가 1932년 가출옥한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조선체육회 이사, 조선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각종 체육단체 임원을 맡아 조선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이 시절,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과 인연을 맺었다.
1934년에 열린 제2회 '조선 풀마라손 대회'는 선생이 직접 대회위원장을 맡아 열린 경기였는데, 이 대회의 우승자가 바로 양정고보 소속의 손기정이었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각종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휩쓸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손기정은 선생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베를린으로 떠났다.
당시 선생은 손기정을 비롯한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환송사를 하며, 일일이 악수를 하고, 등을 두들겨주며 격려했다고 전한다.
"제군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마침내 베를린 올림픽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쟁취한 손기정은, 한국체육사에 길이 남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설 뒤에는 바로 선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체육 활동을 통해 민족혼·독립정신 고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