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7일 오전 신사동 곱창집 '우장창창'에 대한 강제집행이 있었다. 기사와 댓글이 쏟아졌다. 만료된 계약기간을 안 지키고 뭉개고 있는 임대인이 불쌍하지만 잘못했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기사 제목에 '피해자 코스프레', 댓글창에 '을질'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보였다.
#2. 현재 가수 박유천에 대한 성폭행 및 성매매 관련 수사가 진행 중이다. 한때 비슷한 고소가 4건에 이르기도 했다. 기사들엔 '창녀들이 돈에 환장했다''너도 즐겼잖아''피해자인 척 오지고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검색창에 박유천이라 치면 '박유천 고소녀'가 그 다음으로 뜬다.
우리는 참 법을 좋아한다. '법대로'라는 말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신뢰가 상당하다. 물론 법의 판결에 항상 분노하던 대중들도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법을 찾는다. '법대로' 착착, 효율적으로 해결되길 기대하는 듯하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두가 이성적이거나 모두가 계산적이거나 모두가 자기 앞에 놓인 문제에만 전념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내부고발을 하고, 투쟁에 나서는 등 스스로 행동해보려 한다. 그들은 이미 안다. 법은 가장 보편적인 해결책이지만 거기에도 구멍이 있다는 것을.
'우장창창'에 대한 강제집행의 경우 건물주와 임대인 사이에 어떤 분쟁이 있었는지 면밀히 볼 필요가 있다. 건물주가 가수 리쌍으로 바뀌면서 임대인에게 자리를 비우라는 요구가 있었다. 1억의 손해를 무릅쓰고, 자리를 지하 주차장으로 옮기면서도 임대인은 합의를 봤다. 가게는 그에게 생계니까, 개정되기 이전인 당시 법으론 권리금도 지키지 못할테니까. 그 후 건물주는 2013년의 합의문을 번복했고 진흙탕 싸움이 시작됐다.
하지만 맥락이 아닌 현상에 천착한 반응들이 많았다. 법적으로 계약이 만료됐으니 어쨌든 임대인이 나가는 게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왜 애꿎은 연예인한테 '을질'하느냐는 댓글. 그들은 과연 필요 이상으로 이득을 취하려고 '을질'을 했던 걸까. 임대인과 건물주의 관계를 무작정 수평으로 보고 '법대로'를 논하는 건 설령 합법이라 해도 '옳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가수 박씨의 성폭행 혐의에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성을 파는 여성들이 그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을을 수도 있는 맥락에 인색했다. 오히려 '창녀'들이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받은 돈보다 더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연예인한테 '을질'로 매달린다는 서사가 완성됐다. 아직 경찰 수사도, 법원 판결도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수많은 맥락'맹'들이 피해자일 수 있는 상대적 약자들에게 두 번째 상처를 주는 셈이다.
한국에서 '약자'로 칭해진다는 건 이런 소리도 다 들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절대 공평하지 않은 기울어진 땅에 서서 개인적 피해를, 옳지 못한 가해를, 혹은 부당하다고 여겨질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손쉽게 돌이 굴러든다. 이는 일베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세금 축낸다고 욕하는 것, 퀴어 페스티벌에 대해 '조용히 살지 괜히 모여서 지랄'이라는 비난이 이는 것과 비슷하다. 진짜 '중립'에 대한 고민 없이 내 기준에서, 내가 보기에, 지금 사회의 기준에 기대 분쟁을 납작한 평면으로 일축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남이 도움받고 구제되는 것에 민감하다. 반면 다문화가정, 장애인과 같은 남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막연하다. 허나 이러한 사회문제가 구체적인 내 문제가 될 땐 '을질'이라는 인식은 부메랑처럼 매섭게 돌아온다. '법대로'라는 해결책에만 기대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회적 분쟁이 있을 때 그 표면적 현상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 관계적 맥락을 들여다보는 개개인의, 언론의, 정치의, 사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한 사회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모두의 지난한 고민이 깃들어야 한다.
학보사에서 기자들끼리 나눈 대화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부디 이 사회가 자신과 관련 없는 타자를 위하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을'이나 '약자'로 살아도 상관없는 한국이 되길 바란다. 그리 되도록 나부터 노력해야겠다는 반성을 매일 이 글을 보며 되뇌고 있다. 갑이라고 항상 악하진 않으며 을이라고 선량하진 않다. 하지만 '을질'이라는 말로 현상을 개념화하는 데 신중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매듭짓고 싶다.
2015년 11월 28일 일기
같이 새벽을 새우며 수습기자가 물었다. 예전에 막연한 연민이 있었는데 취재를 하고나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겠다고. 4학기동안 신문사를 다니며 어땠냐고. 그는 풀무원 고공농성에 대한 기사를 쓰던 차였다.
"신문사 다니면서 여전히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곳에서 선악의 구분은 무의미해졌고, 각자에게 필요한 말만 무성했죠."
"그래도 기사를 써야 한다면... 목소릴 담아야 한다면 상대와 대등하게 소리치기도 벅찬, 약자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봐요. 어차피 기사 쓰면서 모든 얘길 녹여낼테니까. 취재해온 내용이 다 각자에게 맞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갈수록 가치 판단을 못하는 겁쟁이가 돼가지만, 서로 다른 광화문이 조명받는 지금 내게 남은 불편함. 수습기자의 물음은 엉뚱하게 내 불편함에 대한 답을 줬다.
하수상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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